[STORY] 안신권 광주 나눔의 집 소장 "잊히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 대학원 행정학과 사회복지학전공 99 동문 | |||
---|---|---|---|
“꽃다운 나이 일본군들에게 끌려가 짓밟히고 잃어버린 인생 되찾는데 오십년 세월이 걸렸다.이제는 주름 투성이 할머니 되었지만 용기있는 증언 그 증언의 힘으로 우리는 진상을 알게 되었다.늘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그들의 세계에 이제 환한 빛을 쪼여주자 돌아갈 수 없는 시절 할미꽃이 되었다 해도 색깔 옷 떨쳐입고 날개를 펼친다.여기서 다시 진정으로 원하던 그들의 삶을 산다 구천을 떠돌던 슬픈 넋도 이제 승천하게 하자.”-글 고혜정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1945년까지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설치한 ‘위안소’에 강제동원돼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 당한 위안부 할머니 9명이 생활하고 계시는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나눔의 집’. 최근 비가 내리던 날 찾은 나눔의 집에 들어서자 이 곳에서 생활하시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흉상이 맞이하고 있었다.쏟아지는 비로 인한 분위기 때문인지 할머니들의 모습이 더욱 슬퍼 보였다.그 뒷쪽으로 나눔의 집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들의 가슴을 울리는 삶이 적힌 글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리게 만들었다.저마다의 가슴아픈 사연을 가지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생활을 돌보고 어둠에 있던 할머니들의 힘겨웠던 삶을 세계에 알리는데, 옆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안신권(56) 나눔의집 소장을 만나봤다. -나눔의 집과 인연이 된 계기가 있는가. “나눔의 집은 1992년 10월 설립 당시 불교인권위원회 송월주 큰 스님께서 건립하셨다.2000년 12월 아내가 지인이신 비구니 2명과 나눔의 집을 방문하는데 운전을 해주면서 처음 인연이 됐습니다.당시 나눔의 집에 대해서는 아내와 방송, 인터넷 등을 통해 알고는 있었는데 저도 그때까지만 해도 막연한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이 곳은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의 불은 꺼지지가 않더라고요.스텝들은 출퇴근이 힘드니 이 곳에서 먹고 자야하는 시스템이었습니다.지금은 후원도 있고 지원도 있지만 그때 당시는 후원도 없는 열악한 상태였죠.그 속에서도 저를 반성하게 만든 사람이 있었습니다.단국대에서 도예를 배우러 한국에 온 일본인 여자 유네쿠라 마유미라는 학생이었는데,그 학생이 나눔의 집을 찾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통역을 하고 있었습니다.타 국으로 건너와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꿋꿋하게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당시 저는 일반 회사를 다니면서 국민대 사회복지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나눔의 집을 운영하고 계시던 혜진 스님께서 “사회복지 공부를 하고 있으시니 나눔의 집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일을 도와줄 수 있을까요?”라는 부탁을 받았을때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집안의 가장이고 맞벌이를 하다보니 선뜻 결정할 수가 없어 고심하던 차에 아내가 “여성 인권을 다루는 의미있는 일이니 한번 해보라”는 격려의 말을 해줘 힘을 얻어 하게 됐어요.2001년 2월부터 나눔의 집 총무로 본격적으로 일을 하게 됐습니다.특별한 일을 하게 된 거죠.나눔의 집 소장은 2009년부터 시작하게 됐고 지금까지 17년 동안 할머니들과 생활하고 있습니다.” -할머니들과의 생활은 어떠한가. “처음 맞이한 환경에 할머니들을 대하는게 쉽지는 않았습니다.인간도 서로 성격이 다르듯, 할머니들도 마찬가지로 성향이 전부 다르셨거든요.할머니들은 우선 분노에 차 있는 언어와 행동 등이 무의식에 나오기도 해 무섭기도 했습니다.혹시나 위안부로서의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남성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계시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죠.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모두 다정다감하신 분들이었습니다.단지 정이 그리우셨던 분들이에요.제가 오래 있을지 테스트를 해보시는 할머니도 계실 정도로,거부감 없이 잘 대해주셔서 더 잘 보살펴 드려야겠다는 가슴 뭉클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나눔의 집을 거쳐간 할머니들은 몇분이나 계셨는지. “1993년 6월 일본 위안부 할머니를 지원하는 지원법이 만들어졌는데,이 특별법 이후 2017년 8월까지 등록한 할머니들이 총 239명입니다.현재는 37명만 생존해 계시니 정말 안타까운 마음입니다.현재 나눔의 집에는 9명의 할머니께서 생활하고 계시는데 많을 때는 15명,적을 때는 7명이 생활하셨습니다.나눔의 집은 이 집에서 생활하시는 할머니 10명은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등록된 239명 중 60여 명의 할머니께서 나눔의 집을 거쳐가셨어요.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를 못보고 돌아가신 분도 계시지만,이 곳에 계시다가 나가시는 분,밖에서 생활하시다가 오시는 분,나눔의 집에서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시는 분들도 꽤 계세요.아무래도 오래동안 혼자 생활을 해 오신 만큼 공동생활이 적응이 잘 안되시는 분들도 계시고 마음의 상처로 인해 다른 사람을 믿지를 못하시니 좀처럼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았어요.또 연세가 드신만큼 밖에서 혼자계시면 아무래도 몸이 성치 않으신 분이 계세요.그런 할머니들을 나눔의 집으로 모시고 와서 병원도 모시고 가고 산책도 다니고 있습니다.다만 가족들이 있는 할머니들 모셔오는 것은 쉽지가 않네요.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다보니 나눔의 집에 오시게 되면 비용이 발생할까봐 가족들이 안보내시는 경우도 있어요.그렇다보니 병을 키워서 오시는 분들도 종종 계시는데 그런 분들 모셔오게 되면 정말 마음이 아프죠.그래도 이 곳에 오셔서 병원도 다니시고 할머니들 대부분이 식사를 잘 하시고 계셔서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할머니들과의 기억나는 추억이 있다면. “여기 계시다가 17명의 할머니들께서 돌아가셨습니다.모두 생각나지만 이 곳에 와서 가장 오래 생활했던 김군자 할머니가 그립습니다.지난달 92세 연세로 돌아가신 김군자 할머니는 1998년 나눔의 집에 들어오셨는데 가장 오래 계셨어요.17세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 3년간 계셨어요.이후 일본군이 철수할 때 대부분 할머니들은 중국에 남으셨는데 김군자 할머니는 당시 7명의 할머니들과 의기투합해 38일을 걸어서 한국으로 돌아오실 정도로 강한 정신력과 성격을 가지신 분이세요.위안부 피해에 대해서도 가장 앞에서 알려오신 분입니다. 2006년에는 서울에서 열리는 ‘아름다운 재단’행사에 가시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갔는데, 그동안 정부에서 나오는 생활비와 나눔의 집에서 나오는 용돈 등을 차곡차곡 모으셔서 5천만 원을 기부를 하셨습니다.그동안 살아남기 위한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배움에 대한 ‘한’이 있으셨어요. 재단은 할머니와 함께 김군자 장학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또 2004년 82세의 연세로 돌아가신 김순덕 할머니는 유독 여리셨어요. ‘못 다핀 꽃’ ‘끌려감’등 대표적인 그림을 그리신 분이에요.증언도 많이 하시고 말도 잘하셨고,무엇보다 슬기로우신 분이셨습니다.대부분의 할머니들은 나눔의 집에 들어오게 되면 가족들이 찾아오지 않는데 이 할머니는 아들과 며느리,손자 손녀까지 친하셨어요.며느리가 같은 여자로서 시어머니의 그런 아픔을 감싸주더라고요.돌아가시고 아산병원에서 장례를 치뤘는데 일본에서도 문상을 오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셨습니다.어린나이에 타국에서 모진 큰 일을 당하셨을때는 얼마나 외로우셨겠어요.할머니의 가시는 길은 외롭지 않으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한일 위안부 합의 등 할머니들의 진정한 바람과는 정부가 반대로 가고 있는데 대책이 있나. “많은 분들이 ‘나눔의 집은 정부의 지원을 통해 운영된다’고 오해를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나눔의 집은 위안부 할머니들께서 생활을 하시는 만큼 정치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외교적으로도 문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할머니들 살아 생전에 일본이 직접 진심어린 사과를 하길 바랄 뿐입니다.그런데 지난 정권은 한일 위안부 합의 등으로 할머니들을 너무 힘들게 했습니다.합의 과정에서 할머니들을 만나 진정 이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고 반영을 했어야 했는데,단 한번도 찾아온 적이 없었습니다.내용상, 절차상 문제가 있는 화해치유재단을 당연히 해체하고 합의금으로 받은 10억 엔도 당연히 돌려줘야 합니다. 또 위안부 합의에 문제가 있다고 재합의 한다고 하는데, ‘재’자는 그 전 합의를 인정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재합의’보다는 ‘합의’라는 말을 쓰는게 맞습니다.여성가족부는 나눔의 집은 물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이른바 한일 위안부 합의에 반대했던 단체들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했습니다.여가부는 예산이 부족한 이유라고 설명했지만 보복성 중단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011년부터 이 지원 받은 예산으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리고 기억하기 위해 흉상을 제작해 왔는데 예산 중단과 함께 흉상 제작도 중단된 것입니다.그런데 이 한일 위안부 합의 사건 이후 나눔의 집 방문자가 50% 가까이 늘었고 영화 ‘귀향’이 개봉되면서 일본인 관광객도 많이 찾고 있습니다.후원금은 100% 넘게 증가했습니다.이번 새 정부에서도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데, 정부에서 나서게 되면 정치적이나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이상적인 방법은 할머니들을 위한 단체가 나서서 자료수집, 해외 소녀상 제막 등을 하고 정부는 해당 나라의 언어로 된 리플릿 제작 등 지원을 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 대한 솔직한 심경과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함께 생활하시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떠올리면 ‘일본의 사과를 받고 돌아가셔야하는데’하는 먹먹함이 듭니다.일본은 할머니들께서 돌아가시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지요.그런데 변수가 등장한 것입니다.바로 소녀상이 그것이지요.그런데 이게 한국내에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미국,독일,호주 등 여러나라에 세워지면 당연히 궁금해 할 것이고 할머니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게 되잖아요.해외 사람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진짜 역사를 알게 될까봐 그게 두려워 소녀상 반대와 합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할머니들 모시고 계실때 이 보다 더 큰 성과를 보여드렸어야 했는데 죄송스럽죠.할머니들께서는 살아 생전에 일본에 대해 질타를 많이 하셨어요.그런데 한분 두분 돌아가시니까 질타를 하시는 할머니도 이제 점점 안계시잖아요. 기억에서 또 잊혀지니까. 그래서 잊지말고 기억하자는 의미로 할머니들 흉상을 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다시 또 나눔의 집을 찾는 분들은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흉상을 보면 기억을 해주시더라고요.사실 직원들은 할머니들 흉상을 보면 더 가슴이 아파요.직접 모셨으니까요.직원들은 매일 할머니 흉상을 닦으면서 그동안 못해드린 것만 떠오르는지 죄송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함께 계시는 할머니들께 더 잘하려고 합니다. 마지막 제 소원은 제가 소장으로 있을때 할머니들이 바라시는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고 싶습니다.”
원문보기 : http://www.joongbo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18808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