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 속 미술관] 교내 작품 제대로 알기, 평면미술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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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봄날, 국민대학교의 교정을 둘러보자. 무엇이 보이는가? 땀 흘리며 열심히 축구를 하고 있는 국민*인, 전공서적을 옆구리에 끼고 바쁘게 지나가는 국민*인…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다. 그런데 과연 그 것만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일까? 너무 익숙해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교내 평면미술 작품들. 지금까지의 조형물 작품소개와는 다르다! 조형물이란 다각도에서 누구나 쉽게 관람하고 만질 수, 느낄 수 있는 입체물을 말한다. 조형작품은 그 가치를 천대받다가 모더니즘 시대부터 두각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면미술은 다르다. 평면미술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시작된 최초의 미술이며, 그 후 평면미술에서 일어난 원근법의 발달은 우리가 살고 있는 3D 세상을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2D의 세상으로 옮기는 신비하고 놀라운 일을 해냈다. 지금의 현대미술에서는 조형작품이 주를 이루고, 평면미술과 입체미술을 나눈다는 것은 무의미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분야의 벽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컨템퍼러리 아트가 설치나 조형물 위주가 되었다 하더라도, 벽이 있는 한 회화는 건재하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회화작품이 조형작품보다 공간을 덜 차지하기에 더 선호되고 있는 추세이다. 웹기자 온통은 그런 국민대의 회화작품을 소개할까 한다. 국민*인이 평소 자주 보고 접하는 평면미술 작품들을 조사해 보았다. *컨템퍼러리 아트(contemporary art) : 한국어로 번역시 '동시대미술'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시대미술'이란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나온 현대미술을 지칭하는 말이다. 현재 우리학교가 보유하고 있는 예술작품 중 평면미술품은 조형물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학교 벽에 걸리는 영광을 안을 수 있는 작품은 한정되어있다. 각 대학의 분위기, 공간이 가지고 있는 느낌, 작품의 표현방식에 따라 작품이 걸리는 위치가 다르다. 개인적인 공간이 아닌 학생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에 있는 평면작품은 공학관, 복지관, 법학관 등 3군데로 이루어져있다. 먼저 공학관을 살펴보자! 공학관에 있는 단 하나의 평면작품! 평면과 입체의 미묘한 경계에 있는 이 작품은, 2009년도 미술학부 입체미술전공 졸업생 최황이 만든 작품이다. 위치 : 공과대학 1-2층 사이 계단 1. Good morning (죽은 자의 천국은 없다) / 116x145cm / 5.56mm 총알 8000개 위에 아크릴 채색 / 2008 / 최황 졸업전시를 앞두고 괜한 생각 몇 개를 하던 중 세 가지를 추려보았다. 그저 상념일 뿐이다. 이것이 무의미에 가까운 이미지를 만들 수록 좋겠다고 생각했다. 1) 전위라는 말을 생각해본다. 그것은 사실 예술과는 실질적으로 간격이 있어보인다. 실질적으로 내 일상 이외의 그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는 초상을 그리고 싶었다. 쓸데 없이 광범위하고 먼 거리에 있는 '사회적' 이야기를 머금은 동시에 나의 지질하고도 저열하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억지스럽게 섞어 놓고는 그저 전쟁에 관한 이야기라고 대충 넘겨버린다. 치열하지 못한 내 삶이 광고되길 바라며 작품을 마쳤다. 요약 : 최황은 자신의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오는 자질구레함과 동시에 미디어라는 매체가 전달하는 테러나 내전의 전위적 의미를 합쳐 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일상과 전위, 그 단어가 작가에게 주는 ‘가짜’라는 이미지들은 총알로 된 픽셀로 표현되었다. 그림에서 표현된 사람은 당시 최황의 여자친구이다. 다음으로 복지관을 가보자! 복지관은 가장 많은 수의 국민*인이 지나가는 장소이다. 공대생을 제외한 나머지 단과대의 학생들은 학교 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복지관 4층을 지나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친목을 위한 동아리방이 복지관에 몰려 있고, 학생식당과 국민대학교의 자랑인 빵집 또한 복지관에 위치하고 있어 복지관은 국민*인의 생활에 있어 뗄레야 뗄 수 없는 곳이다. 그런 그 곳에 항상 보이는 평면미술 작품이 있다. 언제나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그 작품. 바로 2008년도 미술학부 회화전공 졸업생 김가혜의 작품 ‘Tsunami’이다. 위치 : 복지관 4층 정문 쪽 통로 2. Tsunami / 130x130cm / oil on canvas / 2007 / 김가혜 <반복의 깊이> 나는 스스로를 회피성 성격장애라고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점차 자존감과 주체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원인을 찾아서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게 되었고 한 사건을 만났다. 그 충격적인 사건은 어린 나보다는 어머니에게 트라우마가 되었고, 그 이후 사건을 함구하게 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무의식 속에서 기억하고 있었고,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불안이 전이되어 점차 회피성 성격을 형성해갔던 것이다. 후에 사건이 꿈이 아닌 현실이한 것을 알게 되면서, 모든 것이 불안으로 인한 자연스러운 신경증이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과거의 기억을 인식하고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고 주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잘못 적응된 습관들로 인해 여전히 회피성 성격인 나를 발견하게 왼다. 머리로는 제대로 지각, 해석하면서도 나의 반응은 습관으로 고정되어 스스로를 억압한다. 요약 : 그림에서 표현된 쓰나미 같은 물은 작가의 기억을 의미한다. 기억은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유동적인 물체라는 것을 암시한다. 중심점을 제외하고 포커스 아웃된 묘사법은 물이 어디에서 쏟아지는지, 손을 어느 시점에서 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야기한다. 또 물 그 자체에 집중하게 한다. 관객 또한 작가처럼 물(작가의 기억이자 주체성)을 인식하게 된다. 복지관을 지나 높은 곳에 위치한 법학관으로 가보자. 국민대학교에서 가장 많은 평면미술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법학관의 벽들이다!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작품들이 보이는 법학관은, 가히 평면미술의 무대라고 부를 수 있겠다. 법학관 1층 카페 앞과 엘리베이터 앞. 국민*인들의 시간이 잠시 멈추는 그 곳에 작품들이 있다.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혹은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며 느긋하게 작품을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국민*인들을 위한 배려같은 이 작품들. 무슨 의미일까? 위치 : 법학관 1층 엘레베이터 앞 3. 하늘에 그려본 풍경 / acrylic on canvas / 240x170cm / 2006 / 박영남 (국민대학교 미술학부 회화전공 교수) <작가의 작업노트 중> 요약 : 현재 국민대학교 미술학부 회화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작가 박영남은 하늘에 그려본 풍경 연작은 사각형과 원, 수직선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형태들을 가지고 자연풍경을 구현한다. 그는 추상화의 자연주의적 접근법을 이용해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구축해 왔다. 또한 작가는 그림그리는 캔버스 위에 아크릴을 붓고 붓 대신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 아크릴 물감은 다른 물감들에 비해 빠르게 마른다. 그 때문에 작가는 캔버스에 물감을 붓자 마자 손으로 매우 빠르게 작업을 진행한다. 작가는 자신의 직관에 의지하여 그림을 그리게 되고 이러한 것은 문명의 도구를 거부하는 본능적인 표현인 동시에, 그 작품을 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시각 뿐만 아니라 촉각의 공감대도 불러일으키게 된다. 법학관 1층 엘레베이터 앞이 빛나는 이유는 이런 작가의 작품이 있기 때문 아닐까. 자, 이제 그 그림을 지나 법학관 카페 앞으로 가보자. 샴쌍둥이 처럼 붙어있는 여인을 그린 그림이 보일 것이다. 이 작품은 2008년도 미술학부 회화전공 졸업생 이경은이 광고를 인용해 그린 그림이다. 위치 : 법학관 1층 카페 앞 4.Eratos(ETRO 광고 인용) / 146x112cm / oil on canvas / 2007 / 이경은
사람들은 누구나 이상을 꿈꾼다. 상상과 감각, 혹은 현실과 기대사이에서 막연하고 모호하기만 했던 이상은 이미지와 결합되면서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한 것처럼 포장된다. 화려함과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눈을 자극시키는 명품광고의 이미지는 허상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이미지화 시키는 매력적인 매개체이다. 이에 대한 무한한 동경은, 인간사회에서 타자의 욕망이 갖는 구조를 적나라게 드러내는 현상이며, 이에 대한 주체의 욕망은 곧 상징세계를 구성하는 타자의 욕망이다. 이상은 ‘추구하는 것’이지만 이미지는 ‘들어맞는 것’이다. 이상은 목표이지만 이미지는 수단이다. 그래픽 혁명 이후 이상을 대체하는 이미지의 범람은 곧 이상의 몰락을 의미한다. 그 결과 이미지는 이상의 재현이 아니라 이상이 이미지의 투사 또는 일반화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나’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완벽한 허상이 된다. 결국, 내 안에서의 주체(진정한 나)와 객체(향유하고자 하는 환상적 존재-another ego)의 사이는 모호한 존재가 되었으며, 왜곡된 동일시는 나의 작업 속에서 기이한 또 하나의 ‘나’가 되어 스스로를 맞이한다. 이렇게 국민대학교 안의 다양한 작품들을 알아보았다. 사실 공학관 계단에 걸린 최황의 작품은 평소 예수상으로 오인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번 교내 평면미술 기사로 인해 국민*인들이 교내 평면미술 작품의 의도를 제대로 알 수 있었길 바란다. 교내 평면미술 작품들을 지나치며 들었던, 그러나 알 수 없었던 궁금증에 대한 시원한 대답이 되었을 것이다. 작품이란건 작품을 봐주는 관람자가 작품을 이해할때만이 비로소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백아절현’이라고 했다. 나의 소리를 알아주는 친구가 있어야 비로소 내 거문고 소리가 빛이나듯이 작품 또한 그러하다. 국민*인들이 작품 안의 숨은 가치와 의도를 알아줄 때만이 국민*인의 작품은 숨을 쉰다. 웹기자 온통은 국민*인들이 가는 발자국 발자국마다 그 가치들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감상이 되었길 바라며 온통은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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