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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성공입니다! / 금속공예가 이상구(생활미술·80졸) 동문
용기…무한한 가능성자신이 원하는 것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것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리는 좋은 직장에서 많은 월급을 받아도 항상 피곤하고 무기력하다. 스스로가 원하는 것을 모르거나 원하는 것이 있더라도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구 동문은 그런 이들에게 말한다. “용기를 가지세요. 진정 원하는 것을 온 몸으로 원하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상구 동문은 1980년에 생활미술학과를 졸업했다.(생활미술학과는 현재 금속공예와 도자공예로 나뉘었다.) 그 당시 금속공예는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못했고 전공하는 사람도 드물었기 때문에 이상구 동문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진출할 수 있는 길은 고작해야 교사나 예술가뿐이었다. “친구들은 내심 교사나 직장인이 되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안정적인 길을 걷고 싶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이상구 동문은 고심 끝에 공방을 차리기로 결심했다. 예술가의 길에 접어들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저도 일반적인 직장에서 평범하게 살고 싶기도 했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 성공한다 해도 행복하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상구 동문은 졸업하기 직전인 1979년 친구 2명과 함께 공방 ‘아르누보’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는 다짐을 했다. 진정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품 활동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그의 뒤에는 김승희(금속공예) 교수가 있었다. “김승희 교수는 인생의 스승이십니다. 그분은 제가 자만했던 시절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김승희 교수의 영향은 지금의 그가 있도록 했다. 지금도 작업실에 김승희 교수의 작품을 걸어놓고 보면서 ‘나를 위한 작품이 아닌, 남을 위한 작품을 만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작품에 임한다. 청산에 살어리랏다!공방 ‘아르누보’를 설립했지만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다. 재정적 어려움으로 마음 놓고 작품을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그는 1983년 동업하던 동료들과 헤어져 북한산 기슭으로 들어와 규모가 작은 개인공방을 설립한다. 유난히 자연을 좋아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런 자연사랑은 그의 예술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중학교까지 충청도 서산에서 자랐다는 이상구 동문은 미술을 안했으면 원예를 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어렸을 적부터 개천에서 놀고, 들판에서 뒹굴며 놀았습니다. 계속 들길을 따라 걷다가 집을 잃은 적도 있으니까 아마 그때부터 자연인의 끼가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상구 동문은 북한산 끝자락에 손수 공방을 만들었다. 자연을 좋아하는 것에 걸맞게 오른쪽 창에는 북한산의 경관을 끌어들였고 왼쪽 창으로는 꽃필 준비를 마친 수선화들이 잘 보이게 심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돼지나 소를 키우는 축사였습니다. 10평으로 시작해 지금의 모습으로 하나하나 만들어 나갔죠.” 자금이 없어 부득이하게 직접 공방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 덕에 운치 있는 공방을 만들 수 있었다. 이후 1997년 공방을 ‘카퍼하우스’로 개명하고 공방과 카페, 그리고 전시장까지 접목한 문화공간으로 창조해냈다. “처음에는 작품을 사러 오는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했는데, 사람들이 차 마시는 것을 부담스러워 해서 팔기 시작했죠. 그러다가 카페가 됐습니다.” 카페를 병행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더욱 잦아들었다. 입소문이 퍼져 분위기 있는 명소로 호응을 얻은 것이다. 때문에 이상구 동문은 찾아오는 손님들이 자신의 작품과 함께 문화 시설을 즐기게 하기 위해 수선화축제와 문화공연을 준비해 손님을 맞는다. 사람들이 동감할 수 있는 작품작품을 소개해 달라는 말을 하자 “카페 전부가 자신의 작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카페를 이루고 있는 하나하나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의자, 스탠드, 책상에서 분수 그리고 가습기까지 그의 작품의 활동 영역은 다양하다. 일상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그가 즐겨 만드는 작품이다. “저는 개인 작품전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만의 작품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다른 사람을 위한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방법도 독특하다. “작품을 만들 때는 기능을 먼저 생각합니다. 추상적인 것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거부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미적인 부분을 첨가하죠.” 쓰는 사람이 제일 편한 금속작품을 만드는 것에 알맞는 제작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기능과 실용성을 겸비하고 그것에 미를 입히니 쓰는 사람을 위한 그의 배려가 작품 곳곳에 묻어난다. 하지만 기능을 최우선으로 한다면 작품의 예술성이 감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의견에 이상구 동문은 “예전에는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괴기한 것들을 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쉽게 사용할 수 있고 모두 동감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기능에도 철학 같은 것들이 있어서 굳이 금속소재의 한정된 범위에서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금속소재가 가지고 있는 기능의 범위를 넓히면 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금속가습기다. 금속으로 가습기를 만드는 것이 상상이 안되지만 실제로 기능의 범위를 넓혀 아름다운 가습기를 탄생시켰다. 목표를 이루는 것이 목표입니다!이상구 동문은 아직도 갈 길이 바쁘다. 할 일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금속공예에 대해 무지한 부분이 많지 않습니까? 때문에 금속으로 만들어지는 일상용품에 미적부분을 첨가하는 것이 저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다할 목표를 이룬 것이 없다고 겸손해 하는 이상구 동문은 카페가 흑자로 돌아서는 것도 목표 중 하나라고 대답했다. “카페 오픈 이후 흑자인 적이 몇 번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행복합니다. 제가 원하는 일을 하니까요.” 대답을 하는 이상구 동문의 모습에서 행복이 보였다. “성공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을 온몸으로 부딪쳐 실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 자체가 성공적인 삶이죠. 남들이 다 원한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가지려고 한다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 없다면 성공도 없겠죠.” 카페운영이 힘들기는 하지만 이상구 동문에게 큰 걱정거리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이 잡은 목표를 이루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이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갖되, 버려라!요즘 대학생들을 보면 끈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이상구 동문은 “자기 자신을 갖되, 버리라”고 충고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향하는 것은 좋지만 노력할 때는 혹독하게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위에 공방을 하다가 좌절하는 후배들을 많이 봅니다. 이것은 의지와 노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모든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 같습니다.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이상구 동문은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들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이렇다할 큰 업적을 이뤄서 가지는 자신감보다는 자신의 삶에 스스로 만족하고 인생을 즐기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자,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지금 무엇을 향해 가는 길인지.
200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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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텍코리아 노학영 사장 / 경영 83학번
[디지털타임스 2006.03.27 04:05:03] “제도적 뒷받침으로 벤처 측면 지원해야” "IT 분야에서만 20년 넘게 있다보니 산업과 기업의 흐름이 눈에 보입니다. 벤처기업은 새로운 기술력도 중요하지만 직원들과 주주를 위한 기업 생존이 우선돼야 합니다"24일 서울 서초동 컴텍코리아 사무실서 만난 노학영 사장은 경영학도 출신답게 현실적인 시각을 갖고있었다. 그는 지난 1979년부터 1991년까지 대한해운그룹의 경영정보시스템(MIS) 추진실 본부장을 지내다 91년 컴텍코리아를 창업했다. 회사를 15년간 존속시켜 온 비결은 이같은 노 대표의 시장에 대한 이같은 현실적인 안목 때문이다.노 사장은 "국내 중소벤처는 세계적인 기술력을 갖고 해외로 뻗어나가는 게 아니라면 국내서는 통신사업자의 수주 시장으로 끝이 난다. 막연히 새로운 기술에 도전하고 힘겨운 해외마케팅에 때문에 문닫는 기업들을 많이 봐 왔다. 이런 도전이 성공하면 벤처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개인과 직원들은 시장에서 퇴출 되고 만다"며 "기술력 가진 기업들이 커 나갈 수 있도록 벤처 펀드가 지원되도록 하는 등 시스템이 뒷받침돼야한다"고 말했다.그는 회사 창업 후 5년 된 해에 자금난을 맞기도 했지만 IMF 위기 때 오히려 회사를 확대 성장시키는 저력을 보였다. 지상파방송사에 송출ㆍ아카이빙 시스템을 제공하면서 방송 시장에 눈이 뜬 노 사장은 미국 위성 헤드엔드(H/E) 기업인 스카이스트림네트웍스와 제휴를 성사시켜 출범을 앞둔 스카이라이프에 H/E를 공급하면서 컴텍의 이름을 높였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인 2002년 8월에는 회사를 코스닥에까지 입성시켰다.노 사장은 그러나 코스닥 등록 직후가 회사의 가장 큰 위기였다고 회상했다. 당시는 중계유선(RO)에 대한 2차 SO 전환이 이뤄지던 시기로, 컴텍코리아는 LG전자ㆍ삼성SDS와 함께 동해ㆍ삼척시 지역 RO의 전송망을 구축키로 하고 20억원을 투자했다. 그러나 해당 RO가 전환심사에서 1점이 미달해 탈락하고, 온미디어 계열의 영동방송으로 매각되면서 20억원을 못 받을 처지가 된 것. 이 건은 현재 대법원에서 소송이 진행중이다.노 사장은 "RO가 파산하자 납품실적이 없는 기업까지 중간에 끼어서 매출채권을 주장하더라"며 "부당하게 돈을 버는 기업, 제품을 받고도 돈을 안 주려는 기업 등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있다"며 담담하게 술회했다.노 사장은 이런 위기를 다 거쳐 지금은 회사가 가장 좋은 시기라고 말했다. 방송통신융합과 뉴미디어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기회가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 SO들에게 전송망 업그레이드를 통해 초고속인터넷 등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 기업 가치를 높일 수 있다는 조언을 해 온 노 사장은 지금은 지상파TV의 위상 하락, 콘텐츠 시장의 부상을 점쳤다.한지숙기자@디지털타임스프로필- 출생 : 1955년 3월15일- 고향 : 충청북도 진천- 가족관계 : 부인과 2남- 취미 : 골프, 색소폰 연주- 주량 : 소주 1병학 력- 1987년 국민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1998년 KAIST 테크노 경영대학원 CKO과정 수료- 1999년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 S-CAMP 2기 졸업- 2003년 고려대학교 언론 대학원 최고위과정 수료경 력- 1979년 ~ 1991년 대한해운그룹 MIS 추진실(본부장)- 1991년 ㈜컴텍코리아 창업- 현 코스닥상장법인협의회 이사- 현 노씨종친회 회장
2006-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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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디자이너 / 순수 국내파 성정기 씨 (공업디자인 97학번)
[동아일보 2006-03-13 03:05]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디자인 전문회사 ‘IDEO’의 제품 디자이너 성정기(36·사진) 씨의 명함은 한 장이 아니다.자그마치 10장이 한 세트로 구성돼 있다. 이 명함에는 전화번호뿐 아니라 그가 디자인한 작품들이 그려져 있어 ‘휴대용 포트폴리오’ 역할을 한다. 디자이너라면 본받을 만한 멋진 아이디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작품들이 모두 국내외 유명 공모전 수상작이라는 것.그는 2001년 ‘LG전자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금상을 받은 뒤 ‘LG생활건강’ ‘소니 코리아 디자인 공모전’ ‘iF 디자인 어워드’ ‘브라운 국제 디자인 공모전’ ‘오퍼스 국제 디자인 어워드’ 등 국내외 굵직한 공모전에서 주요 상을 받았다.그는 흔한 어학연수 한번 가지 않은 순수 국내파(국민대 공업디자인과 졸업)다. 하지만 지난해 디자이너에게 ‘꿈의 공간’으로 불리는 IDEO의 문턱을 넘었다.IDEO는 그가 디자인한 작품을 자료 형태로 만들어 제출한 포트폴리오에 대해 “이런 것은 받아 본 적이 없으며 매우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IDEO에는 매주 150∼170여 명의 지원자가 밀려든다. 이곳에서 그는 포트폴리오만으로 입사한 특별한 케이스다. ‘영어가 짧다’는 단점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국내 대기업 디자인실에 근무하던 그가 IDEO에 도전한 것은 이 회사의 공동 창업자 빌 모그리지 씨의 영향이 컸다. 모그리지 씨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드처럼 그에게 꿈을 키워 준 존재였다. 현재 그는 보스턴 IDEO 사무실에서 ‘알콘’ ‘타깃’ ‘존슨 앤드 존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e메일을 통해 “언젠가 모그리지 씨와 한 직장에서 일하겠다는 오랜 꿈을 이뤘다”며 “내게 디자인은 꿈을 현실로 바꿔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성 씨는 무심코 넘겨 버리기 쉬운 일상의 작은 실수에서 디자인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LG생활건강 디자인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샴푸 용기 디자인은 눈을 감고 머리를 감다가 샴푸와 린스를 구별하지 못해 실수한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그는 특히 시각장애인의 불편을 감안해 손으로 느껴 구분할 수 있도록 샴푸와 린스 용기에 다른 형태의 홈을 넣었다. 브라운 국제 디자인 공모전에서 상을 받은 카트는 무거운 짐을 카트에 실어 나르다 타고 놀았던 기억을 떠올린 것. 일과 놀이를 결합한 발상이었다.독일의 iF 디자인 어워드 수상작 ‘이스틱(e-stick)’은 어떤가? 공원에서 몸이 불편한 노인들을 지켜 보다 지팡이에 휴대전화나 내비게이션 등 정보기기를 결합시켰다.전은경 월간 ‘디자인’ 기자 lilith@design.co.kr
2006-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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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는 정통 민족사학이다
국민대학교가 개교 60주년이 되었다. 일제 침략기에 백범 김구선생 등 대표적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중국 천지를 떠돌며 민족독립운동에 앞장서셨던 해공 신익희선생께서 국민대학을 설립하신지 올해로 환갑을 맞게 된 것이다. 내가 입학하여 알게 된 내용만으로도 국민대학은 참으로 힘든 발전 역사를 견디어 왔다. 어찌보면 국민대의 초기 역사는 민족의 비운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민족독립운동가에 의해 민족대학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친일세력들이 서서히 발호하던 당시에 주로 일제때 학업에 나설 형편이 되지 못했던 양심적 인사들이 주로 국민대학생이 되고 있었으니, 이승만정권에도 미움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틈새에서 결국은 설립자 신익희선생께서 이승만의 정적이 되어 민주화를 위한 정치에 주력하셨으니 더불어 국민대의 수난은 극심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았으리라! 나는 해공선생의 국민대 설립 사실을 인지한 뒤 입학하여 지금은 총 동문회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그리고 국민대학에서 주요한 민족정신과 민족 주체성의 교육이 이루어 질 수 있으리라는 굳은 신념을 같고있다. 해방이후 친일 풍토에 의해 약화된 민족의식의 쇠약 현상을 극복하려는 노력없이 우리 국운을 개척 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역사의식으로 국민대학이 민족, 민주, 평화통일의 소임을 다하는 최고 교육기관이 되도록 총력을 다하려 한다. 오늘 국회 국방위원장인 유재건의원과 함께 국민대 ROTC 장교 임관식에 참석하였다. "장교 여러분 그리고 훈련과정에 있는 후보 여러분, 국민대는 백범 김구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지휘했던 해공 신익희선생의 뜻이 깃든 곳이다. 안중근,윤봉길,이봉창의사 같은 독립군을 지휘했던 정신이 여기에 있음을 명심하자. 우리 국군역사에 철기 이범석장군이 계신다. 이분은 독립군 출신이다. 국민대 출신 장교들은 이러한 정신을 이어 받아라. 그래서 국가를 반석위에 올려라. 그러면 국민대학이 빛나고 국가가 건강하게 될 것이다." 나는 후배들의 적극적인 역할과 활동을 주문하였다. 그들의 무운장구를 기원하고 싶다. 무릇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에나 각각 그에 따른 존재 이유가 있는 법이다. 대한민국은 지난 날 친일 반민족 세력에 이어 우리의 고유한 중심정신 수립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 나는 이러한 상처의 철저한 치유 노력 없이는 결코 위란의 시대를 능동적으로 대처 할 수 없다고 본다. 한미동맹의 온실에서 그럭저럭 살고 있는 현실에 안주하면 우리는 머지않아 심각한 민족적 혼란에 휩싸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한미동맹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은 우리 스스로가 견고할 때 지켜진다. 감히 국민대학의 막중함을 강조하고 싶다. 부족한 부분을 민족대학인 국민대학이 책임질 각오를 다지자. 우리 국민도 언젠가는 국민대학에서 우리의 본 모습을 찾아 나서리라는 믿음을 갖는다. 3월2일이면 북악뜰 국민대학교에서는 2006년도 입학식이 거행된다. 어쩌면 그 자리에서 젊은 후배들에게 너무 무거운 축사를 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그러나 즐거운 얘기를 하려고 노력해야 하겠다. "자랑스러운 국민대학생 여러분! 여기는 민족 앞에 자랑스러운 민족의 성지입니다. 오로지 큰 자존심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자신있게 개척하는 선봉이 되십시오! 그래서 고구려의 높은 기상을 국민인이 함께 열어 갑시다!" 2006.2.24 장영달
2006-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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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토건, 카자흐 ‘1조 아파트 공사’ 개척 / 동일토건회장 고재일동문(경제 60학번)
[문화일보 2006-02-15 16:41] 국내 건축업계는 1만3000개 업체가 뛰고 있는 전형적인 ‘레드오션’이다. 생존을 위해서라도 해외진출은 필연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업체가 진출하는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 역시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는 블루오션이 아니었다. 세계 유수 기업은 물론 우리 업체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는 또 다른 ‘레드오션’이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은 국내 업체의 관심밖이었다. 2000년부터 해외진출을 기획해온 동일은 이곳을 주목했다. 카스피해 석유생산지를 끼고 있는 카자흐스탄은 석유매장량이 세계 6위로 중앙아시아의 사우디아라비아라고 불린다. 또 아연매장량 1위, 구리 우라늄 매장량 3위의 자원 강대국이다. 이 자원을 토대로 매년 9%의 성장을 하고 있다. 국민소득은 2004년 2700달러에 불과했지만 상 류층의 소득은 1만 달러 이상으로 생활수준은 유럽과 비슷하다. 국내에서 아파트 사업으로 성장해온 동일은 카자흐스탄의 행정신도시인 아스타나 경제특구에 아파트를 건설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따내기 위해 도전장을 내밀었다. 경제특구는 관세 등이 면세돼 15%의 이익이 보장되는 금싸라기 땅이다. 국내에서는 아파트 최초로 지상주차장을 없애고 주민자치 체력단련센터를 도입해 명성을 쌓아온 동일이었지만 외국에서 인지도는 낮았다. 현장소장을 맡고 있는 임정환 이사는 “유럽 업체만 알고 있던 이 나라에서 동일하이빌이 아파트를 짓는 것은 맨처음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동일이 한국에서 지어왔던 아파트를 보자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적극적인 후원도 사업추진에 큰 힘이 됐다. 동일측이 사업추진 성공을 확신한 것은 모델하우스가 문을 열던 날이었다. 화려한 인테리어의 한국 아파트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스타나 시민 수천명이 찾아왔다. ‘다모’ 등 한국드라마의 인기에 이은 또 하나의 한류열풍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동일하이빌이 분양한 아파트는 최대 평형 120평형으로 평당 600만~700만원에 이른다. 1인당 국민소득이 연2700달러에 불과한 카자흐스탄에 서는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이들이 타고 온 차들은 벤츠와 아우디 등 독일차가 대부분일 정도로 상류층이었다. 이들은 입주 전 완벽하게 집을 꾸며놓은 한국식 모델하우스에 감 탄했다. 또 추위가 심한 이 지역 주민들은 실내의 바닥이 따뜻해지는 한국식 온돌문화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동일의 모델하우스 는 이런 입소문 끝에 지난해 10월 모델하우스를 열자마자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타타르스탄 샤이미예프 대통령까지 모델하우스를 찾기도 했다. 현지 분양을 총괄하고 있는 이문주 이사는 “선착순으로 모집하는 1차분 389가구 분양이 성공리에 끝났다”며 “이 나라 상류층의 고급 아파트 욕구를 겨냥한 한국식 아파트로 한류 돌풍을 일 으켰다”라고 말했다. 고재일 회장은 “카자흐스탄의 성공을 발 판 삼아 인근 우즈베키스탄이나 터키 등 새로운 블루오션을 개척 하겠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권은중기자 jungkk@munhwa.com ‘에너자이저’ 고재일 동일토건 회장 60세때 건설업 첫 발 골프 대신 현장 순례 열정·체력 20대 뺨쳐 동일하이빌은 후발 주택업체이지만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는다. 아파트 단지내 최초로 지상주차장을 없애고 지상에 실개천이 흐르는 대규모 녹지를 처음 선보인 것이 동일하이빌이었다. 또 아파트 커뮤니티 활성화와 손님맞이를 위한 일종의 카페인 게스트 하우스와 주민전용 단지내 체력단련장·사우나도 동일이 처음 선보인 것이다. 이 때문에 이런 개념이 처음 도입된 천안 불당 동일하이빌은 주변 아파트와 분양가는 비슷했지만 지역내 가장 높은 프리미엄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획기적인 신개념의 아파트로 동일토건은 설립한 지 10년만에 한해 5000가구의 아파트를 짓 는 도급순위 50위권의 건설사로 뛰어올랐다.동일하이빌의 이같은 성장 뒤에는 고재일(67·사진) 동일토건 회장이 있다. 그는 ‘통 큰’ 건설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숫자를 다루는’ 회계사 출신이다. 58세였던 95년 그는 ‘좋은 집을 내 손으로 짓고 싶다’는 평소 꿈을 이루기 위해 회계사 업무를 접고 건설사 창업에 들어갔다. 다들 은퇴해 노후를 즐기는 60의 나이에 그는 거칠기로 소문난 건설업에 첫발을 디뎠다. 하지만 그의 체력과 열정은 20대 청년을 연상케 했다. 그의 별명은 에너자이저. 빡빡하기로 소문난 일정을 거뜬히 소화하는 것은 물론 일요일에도 수시로 임원들을 호출하거나 현장을 방문했다. 동일측 한 임원은 저녁 비행기를 타고 1박2일짜리 베트남 출장 을 가본 적도 있다며 혀를 내두룰 정도다. 덕분에 일년에 그의 자동차는 10만㎞의 주행거리를 기록한다. 시간이 아까워 골프도 치지 않는다. 대신 전국에 흩어져 있는 아 파트 현장을 방문한다. 현장 방문 때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 좋은 나무를 보면 그 나무와 비슷한 나무를 구해서 직접 심을 정도다. 외국에 나가더라도 가장 좋은 주택과 아파트를 반드시 둘러본다. 거기서 얻은 영감은 설계도면에 반영한다. 카자흐스탄의 주택사업도 결국은 국내 소비자들에게 최상의 주택 을 짓기 위한 학습의 과정이라는 게 고 회장의 생각이다. 세계 각국의 주거 문화, 건축 양식, 생활 관습 등의 장점을 파악해 좀 더 나은 주택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에 한국식으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모델하우스나 온돌문화를 고집한 것도 이 런 소신에서다. 그의 이런 철두철미한 사업가 정신은 사업초기 시련으로 담금질 된 것이다. 첫사업이던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고급빌라를 지었지 만 분양이 안됐다. 결국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부도위기를 맞았다 . 2명만 남겨놓고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잠실에 한 칸짜리 사 무실을 얻어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고 회장은 당시를 “시장분 석에 실패했던 것입니다”라며 “그때 많은 걸 깨달았습니다. 그후 에는 언제나 ‘이게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 했습니다”라고 회고 했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정신 력과 집에 대한 늦깎이의 열정을 토대로 동일토건은 주택사업의 강자로 떠올랐고 마침내 카자흐스탄에 10억달러에 달하는 주택 사업을 따낼 수 있었다. 한번의 시련후 동일은 승승장구했고, 10 년만에 카자흐스탄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할 수 있었다. 권은중기자
2006-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