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신춘문예] [희곡 당선작/당선소감/심사평] 달빛 / 남은혜(음악학부 06) 동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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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내 삶에 벌어진 일 맞나 응원해 준 知人에 감사 저의 삶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는데 당선 전화 한 통화에 모든 것이 달라 보입니다. 살기 위해 발버둥쳤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아, 이제 가슴에 걸리는 것 없이 숨이 잘 쉬어집니다. 하나님, 살아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이따금씩 꿈을 꾸는 것만 같습니다.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얼떨떨합니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지만 현실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누구보다 기뻐하시는 소중한 내 부모님, 그리고 가족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작품과 삶을 어떻게 들여다봐야 하는지 알려주신 김수미 선생님, 머리 숙여 감사합니다. 그리고 곁에서 제 꿈을 응원해 주신 모든 친구, 언니, 오빠, 동생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글을 배우러 다닐 수 있게 배려해 주신 직장의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또 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작가가 되겠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근 200편에 이르는 응모작 가운데 특별히 세 작품이 주목을 끌었다. 엄정숙 작 '포도의자', 조현주 작 '꽃배달 갑니다', 남은혜 작 '달빛' 등이다. '포도의자'는 구조가 강렬해서 인상적이었지만, 등장인물들의 동기 설정이 다소 진부하게 느껴졌다. 우리 두 심사위원은 '달빛'과 '꽃배달 갑니다'를 최종 후보로 놓고 오래 고심하였다. 서로 이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두 작품이 다 뛰어났기 때문이다. '꽃배달 갑니다'는 60대의 두 부부가 지하철로 꽃배달을 떠나며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지극한 부부애와 무심한 지하철의 인간 풍경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병든 아내와 몸이 실하지 못한 남편이 서로를 위하는 모습에서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진정한 사랑의 가치가 소생된다. 그러나 자리를 다투고 싸움하듯 스쳐 지나가는 승객들로 인해 두 부부가 배달하는 꽃은 목적지에 도달할 땐 이미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다.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설정인데, 극의 구조가 참 탄탄하고 절묘하다. '달빛'은 자유를 갈구하는 두 모녀의 이야기다. 피아노 선생인 딸은 자폐아에게 피아노를 교습시키면서 오히려 자유를 배우고, 남편과 딸로부터 자유를 원하는 엄마는 끝내 편안한 화해를 거부한 채 자신의 독립을 지킨다. 이 희곡은 20세기 초반 작곡가들의 음악을 사용하여 극적 행동과 인물의 심리를 반영하는 독특한 형식을 실험하고 있다. 음악에 대한 작가의 지식이나 경험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고 음악을 바탕으로 진행되는 장면들은 간결하고, 진실하고, 시적이다. 참으로 쿨한 작품이다. 우리 심사위원들은 진정한 이야기와 새로운 형식을 과감하게 실험한 '달빛'이 신춘문예의 성격에 더 적합하다는 데 최종적으로 합의했지만, '꽃배달 갑니다'의 수월성을 상 주지 못함에 대해서는 여전히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을 가르치려고 승현이와 씨름을 했던 것일까 엄마와 나는 쇤베르크 메트릭스에 놓인 12음처럼 여자 30세 엄마 55세 아빠 60대 초반 남자 친구 30세 승현 자폐아, 10대 초반으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가늠할 수 없다. 남자이지만 성별을 명확히 하지 않아도 된다.
무대 무대 위에는 기본적으로 그랜드 피아노 한 대만 있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소품, 조명의 변화에 따라 여자의 집 또는 직장, 남자 친구의 집이 되기도 한다. 여자의 심리 상태에 따라 피아노 뚜껑의 열리고 닫힘의 각도가 달라진다. 음악은 인물의 심리 상태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고전과 낭만 시대의 7음계를 떠나 12음의(12음 기법, 무조 음악) 중요성을 동일하게 생각하는 현대음악의 불협화의 울림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세계를 투영한다. 또한 음악의 3요소인 선율, 리듬, 화성을 완벽하게 무너뜨린 현대음악을 통해 작품에서 말하고 있는 정상, 비정상의 기준을 보여준다. 벨라 바르톡, 찰스 아이브스, 죄르지 리게티, 에드가 바레즈, 쇤베르크, 베베른, 드뷔시 등 1900년도 초반 작곡가들의 음악을 사용하여 작품의 성격과 분위기를 보여준다. 피아노와 현악기, 여러 가지 타악기의 일반적이지 않은 주법, 클러스터 기법의 무거운 음색이나 하모닉스의 귀가 찢어질 듯한 음색, 미분음을 사용하여 작품 속의 인물과 상황, 심리를 표현한다.
1. 벨라 바르톡(B�la Bart�k)-미크로코스모스 6권, 140번(Mikrokosmos,Volume VI, 140) 바르톡의 미크로코스모스가 흐르면 막이 오른다. 닫힌 피아노 뚜껑 위에는 낱장의 악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여자, 등장해 피아노 의자 위에 힘없이 앉는다. 곧 승현이 등장한다. 여자 승현이 왔니? 어서 와. 승현, 피아노로 가까이 가면 여자, 자리를 비켜준다. 여자 우리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었지? 여자, 피아노 뚜껑 위에 흩어져 있는 악보들을 분주하게 정리한다. 여자 여기 있다. 오늘은 '도레미'까지 배울 차례네. 자, 해보자. 도가 어디였지? 여자, 승현 옆에 앉는다. 승현, 건반을 아무 음이나 반복적으로 친다. 여자 승현아, 피아노 그렇게 치는 거 아니라고 얘기했었지? 자, 다시 해보자. 도 자리가 어디라고 했지? 승현, 다시 건반을 친다. 여자 (자폐아의 손을 잡으며) 승현아. 승현, 여자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같은 건반을 친다. 여자 승현아, 잠깐만. 선생님 말 좀 들어 보자. 응? 승현, 고개를 젓는다. 다른 쪽 팔로 건반을 친다. 여자 선생님이 말하는 대로 하면 승현아, 너 정상으로 보일 수가 있어. 같이 해보자. '도'가 어디 있다고 했지? 승현, 여자의 팔을 거칠게 뿌리치고 다시 건반을 친다. 여자 (자폐아의 두 손을 강하게 잡으며) 승현아!! 너 맘대로 치지 말랬잖아!! 너 할 수 있잖아! 해봐!! 할 수 있어!! 승현, 여자의 팔을 계속 뿌리치려고 하자 여자, 포기하고 승현을 바라보고만 있다. 승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건반을 친다. 승현의 피아노 소리 위에 음악이 흐른다. 여자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생각인 것일까. 나는 이 아이를 치료할 수 있을까. 아무 음이나 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 단순한 모방, 반복, 전위, 다양한 진행들이 섞인 바르톡의 음악처럼, 이 아이도 나에게 무언가 얘기하려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어서 방치해 두는 것이다.
2. 죄르지 리게티(Gyorgy Ligeti 1923-2006)- 아토모스페라스(Atmospheres) 승현의 피아노 소리 서서히 줄어들면, 닫힌 피아노 뚜껑 위에는 자명종이 있다. 남자 친구의 집이다. 남자 왜 못 한다는 거야 또? 여자 뭐가, 배고프다구. 밥 먹으러 가자는데 왜 이래? 남자 니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야? 도대체 뭐가 문제야. 여자 아무 문제 없어. 남자, 여자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으며 키스하려 하자 여자 잠깐만…! 남자, 여자에게 계속 키스하며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다. 여자, 남자의 손을 저지하고 남자를 밀친다. 여자 싫다고 했잖아! 남자 (한숨 쉬고) 너 이러는 거 정말 질려. 사랑하는 사이에 SEX는 자연스러운 거야. 여자 나도 알아. 나도 아는데…. 그게 잘 안 돼. 남자 왜! 여자 (남자의 말을 끊으며) 묻지마.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설명할 수가 없어. 나도 답답해…. 남자 …. 너 SEX는 핑계고 내가 싫어진 거지? 여자 아냐, 너는 사랑해. 남자 내가 물어봐서 일부러 해야 하는 그런 대답 말고. 정말 진심으로 날 사랑하냐고. 여자 …. 남자 너가 처음에 싫다고 했을 땐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고 생각했고, 두 번째엔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었어. (점점 화가 난다.) 근데 지금 이러는 건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넌 아직도 날 못 믿는다는 거야? 여자 그게 아니야…. 널 믿어. 의심하지 않아. 널 사랑해. 남자 그럼 뭐야. 우리 관계는 이게 끝이야? 더 이상 갈 곳이 없니 우린? 여자 꼭 SEX가 우리의 관계를 증명해 주는 건 아닐 거야. 기다려보자. 다른 방법이 있겠지. 남자 도대체 언제까지! 난, 난 너한테 뭐니? 니가 날 왜 만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여자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꼭 SEX를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남자 그럼 사랑하는 사람 말고 SEX는 누구랑 하는데? 내가 SEX에 미친놈도 아니고! 왜 이런 걸로 매번 너랑 싸워야 하냐구! 여자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하겠지! 남자 너 그럼 내가 다른 여자랑 자도 상관없어? 여자 SEX는 SEX고 사랑은 사랑이지. SEX는 그냥 동물적인 행위일 뿐이잖아. 남자: 나 다른 여자랑 잤어. (사이) 여자 넌 그냥 그 행위를 한 거야. 그거 사랑 아니잖아. 남자 (어이없다) 그래서, 괜찮다는 거야? 여자 그 여자 사랑하는 거 아니잖아. 남자 야, 너 그거 사랑 아니야. 내가 다른 여자랑 잤다고 했을 때 넌 최소한 나한테 화를 냈었어야 해. 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소리 지르면서 따귀라도 쳐 올렸어야 해. 여자, 아무 말이 없다. 남자 넌 날 사랑한 적이 없는 거야. 남자, 뒤돌아 나간다. 여자 (남자를 따라가 뒤에서 안으며) 아니야, 사랑해…. 가지 마. 남자 (여자를 떼어놓으며) 그럼 너 나랑 SEX할 수 있어? 음악이 흐른다. 여자 그가 물어봤을 때, 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리게티, 그는 정상적이라 여겨지던 음악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구조를 창조했다. 과연 나는 내 안에 무너져 내린 것들을 새롭게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새롭게 만들어진 세계가 비정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무엇이 무너졌는지, 어디서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지. 난 정답을 찾을 수가 없다. 남자 왜 대답을 못해. 너 나랑 SEX할 수 있냐구. 여자, 대답 대신 나간다. 남자, 여자를 따라 나간다.
3. 벨라 바르톡(B�la Bart�k)- 스트링 쿼르텟 4번 5악장(String Quartet No. 4) 조명 환해지면 엄마와 아빠가 있다. 닫힌 피아노 뚜껑 위에는 말라버린 장미꽃 한 송이가 꽂혀 있는 화병이 쓰러져 있다. 엄마, 팬티를 벗어 던지고 엄마 자 해! 아빠 …. 엄마 하라고, 팬티 벗었잖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아빠 …. 엄마 니 맘대로 하라고! 아빠, 엄마에게 키스하려 한다. 엄마, 창자가 끊어질 듯 악을 쓴다. 엄마 아-악!!!! 아빠, 놀라서 엄마의 곁에서 떨어진다. 엄마 (분노에 차) 만지지 말랬잖아! 너 싫댔잖아! 아빠 맘대로 하라며. 엄마 (울음을 삼키며) 닥쳐!!!!! 한동안 화가 나 거친 숨을 쉬던 엄마, 진정한 후 소주를 병째 마신다. 아빠, 엄마를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아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니. 엄마 그냥 싫어. 니 숨소리만 들어도 소름이 끼쳐 돌아버릴 것 같아. 아빠 그럼 어떻게 할까. 엄마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이랑 살았던 30년 세월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어. 엄마, 다시 술을 마신다. (사이) 아빠 내가 그렇게 싫으니? 엄마 그래, 싫어. 더 이상 묻지 마. 아무것도. 아빠, 엄마를 잠시 바라보다 뒤돌아 퇴장한다. 여자 등장한다. 병째 술을 마시는 엄마를 보고 한숨을 쉬며 여자 또 술이야? 엄마 내버려둬. 여자 왜 그러는 거야 맨날. 엄마 상관하지 말랬지! 여자 엄마, 나 좀 살자. 엄마 살아! 누가 너보고 죽으래?
여자 나 엄마 이런 모습 보는 게 너무 힘들어. 엄마 힘들어? 나도 힘들어. 근데 난 너 보잖아. 너도 봐 나. 싸가지 없는 년. 여자 욕하지 마. 나 엄마한테 욕 먹을 만큼 잘못한 거 없어. 엄마 그럼 난? 난 너한테 잘못한 거 있니? 여자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엄마 엄마 보고 첫 마디가 또 술이야가 뭐냐!내가 왜 너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데? 또 저 표정... 너 밖에 나가서도 그 표정이니? 아닐걸? 니 얼굴에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써있어.나쁜 기집애. 너 맨날 나한테 따지지. 잘못했다고 나한테 지적질하는 거니? 그러는 넌 인생을 얼마나 바르게 사니? 여자 내가 틀린 말 했어? 엄마 맨날 술 마시잖아. 그게 정상이야? 술 마시는 거 꼴 보기 싫어서 한마디했다. 난 그런 말도 못 해? 엄마 니 기준에서나 틀리지. 내 기준에서는 하나도 안 틀려. 여자 억지 부리지 마. 엄마 이럴 때마다 정말 질려. 엄마 그럼 나가! 나도 너 같은 거 필요 없어! (사이) 여자 그래, 엄만 날 늘 버렸어. 이제 이상하지도 않아. 중1 때부터 지금까지 엄만 날 늘 버리기만 했어. 그거 알아 엄마? 난 그날 아침을 잊을 수가 없어. 학교 가려던 나한테 따로 살자 말했던 그 날 아침의 엄마 표정, 울면서 걸었던 그 아침의 거리.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던 그날. 엄마, 난 아직도 그날에 살아. 오늘은 아니겠지, 오늘은 다르겠지 하면서 눈을 뜨면 매번 다시 그날 아침이야. 그 매일의 아침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엄마 알아? 내 시간은 조금도 흐르지 않았어. 엄마 그래. 내가 견딜 수가 없어서 그 한마디했다 치자. 그걸 뭐 그렇게 잊고 안 잊고니? 난 더한 것도 견디며 사는데. 니 나이 서른이다. 너 지금 이러는 거 정상 아니야. 여자 정상이 아니라고?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그러는 엄만 정상이야? 엄마, 난 그때 고작 열네 살이었어. 내가 그 말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엄마 넌, 넌 살면서 그런 말 한 번도 안 했니?지금 나 너랑 살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여자: ...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야? 엄마, 지금 엄마의 그 말 한마디로 지나간 내 15년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어. 여자, 뒤돌아 가려 하자 엄마 난 너한테 최선을 다했어! 여자 최선? 엄마의 최선이 뭔데? 엄마에게 최선이 나에게도 최선이였을 것 같아? 서로에게 소리지르고 싸우는 엄마 아빨 보면서 난, 매일 밤마다 울면서 잠들었어. 엄마가 떠날까봐 눈치 보는 게 버릇이 됐어. 지금까지도 난 그래. 이런 나를 보고도 최선이라는 말이 나와? 엄만 나에게 최선을 다한 게 아니라 엄마 스스로 변명거리를 찾은 거야. 아빠, 캐리어를 끌고 나온다. 아빠 간다. 여자 아빠도 마찬가지야! 아빠, 여자의 말을 듣고 선다. 여자 맨날 도망만 치지 해결하려고 하질 않잖아! 우리 꼴 좀 봐! 아빠, 캐리어를 끌고 퇴장한다. 여자, 아빠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를 지른다. 아빠: 끝까지…. 아빤 비겁한 거야! 여자, 엄마를 등진 채 여자 축하해 엄마. 여자 아빠가 떠났다. 엄마는 30년의 기나긴 싸움 끝에 승리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또 이곳이다. 유난히도 바르톡의 스트링 콰르텟이 좋다. 폭풍 같은 현의 보잉과 하모닉스의 귀가 찢어질 듯한 음색 때문이겠지. 그의 음악은 나와 닮았다. 그의 음악은 내 안에 늘 흐르고 있다. 내 안의 폭풍처럼...
피아노의 같은 음을 반복적으로 치는 소리가 들린다. 조명 밝아지면, 닫힌 피아노 뚜껑 위에 낱장의 악보들이 흩날려 있다. 승현과 여자가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 있다. 승현, 피아노를 치고 있다. 여자 그래, 니가 이겼다. 치고 싶은 대로 맘껏 쳐. 여자, 말을 끝내고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선다. 승현, 처음에는 같은 음만 연속해 치더니 곧 손바닥으로, 주먹으로, 팔뚝을 이용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다. 여자, 피아노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승현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 승현, 다시 같은 음만 연속해 친다. 여자 이제 됐니? 맘껏 쳤으니 이제 다시 해보자. 승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같은 건반을 반복적으로 친다. 여자 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가르쳐주는 대로 안 쳐 왜! 내가 시키는 대로 치란 말이야!! 여자, 자신의 말에 놀란다. 승현, 피아노를 팔뚝으로 시끄럽게 치기 시작한다. 제일 낮은 음역에서 팔뚝으로 건반을 누른 채로 멈춘다. 여자 그래 승현아. 이거였나 보다. 난 어쩌면 널 부러워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널 말이야. 승현, 다시 같은 건반을 반복적으로 치기 시작한다. 여자, 승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여자 그래 맞아. 나도 너처럼 자유로워지고 싶어. 늘 그것을 원했겠지. 하지만 이미 늦어버린 걸까? 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승현, 여전히 같은 음을 치다가, 손바닥으로, 팔꿈치로 피아노의 여러 음역을 친다. 여자 듣고 있니? 넌 항상 다른 세상 사람 같아.그곳은 어떤지 궁금하구나. 내가 사는 곳과는 다른 세상이겠지? 그곳은 누가 어떻게 살아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곳이었으면 좋겠구나. 너라도 그렇게 살아. 자유롭게…. 승현,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도'를 찾아 친다. 여자, 놀라서 승현을 쳐다본다. 여자 절대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도'를, 그렇게 찾길 원했던 '도'를 찾았다. 아이브스가 사용했던 미분음처럼, 정상과 비정상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할 것 같았던 승현이가, 정상을 찾아간다. 과연 이것이 정상일까. 이것을 가르치려고 그토록 승현이와 씨름을 했던 것일까. 그렇게 찾길 원했던 '도'를 찾았는데, 나는 기쁘지가 않다.
5. 쇤베르크 (Arnold Schoenberg)-피아노 협주곡 Op. 42(Piano Concerto Op. 42) 여자가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 엄마가 서 있다. 피아노 뚜껑은 조금 열려있고, 시들어 가는 꽃 한 송이가 꽂힌 화병이 보인다. 엄마 얘기 좀 해. 여자 …할 얘기 없는데. 엄마 난 몰랐어. 니가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줄. (사이) 엄마 그때 난…. 여자 엄마, 듣고 싶지 않아. 불편해. 엄마 … 내가… 널 늘 버렸니? 여자 그땐 그랬잖아. 난 그걸 잊지 못한 거고. 엄마 그래. (사이) 엄마 미안하다. 여자 됐어. 이제 와서 뭘. 엄마 그 이야기가 너에게 상처가 될 줄 알았으면 난 하지 않았을 거야. 서른 먹은 내 딸이 아직도 이렇게 그 얘기가 아픈 줄 알았으면, 그냥 나만 아프고 말았을 거야. 근데 그래도 난 니 엄마야. 니가 아무리 내가 밉고 싫어도, 그건 바꿀 수 없어. 여자 알아 엄마.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아픈 거잖아.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여자 엄마의 이런 모습이 어색하다. 마치 12음열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어색하다. 엄마와 나는 그런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쇤베르크의 메트릭스에 놓인 12음처럼, 서로 눈치 보고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그런 관계. 이제 엄마와 나를 위해 움켜쥔 손을 놓아야 할 수도 있겠다.
6. 에드가 바레즈(Edgard Var�se)-이오니제이션(Ionisation) 여자, 뒤돌아 보면 아빠가 상을 들고 무대 위로 나온다. 아빠 밥 먹자. 여자 진짜 아빠가 한 거야? 아빠 응. 여자와 아빠,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여자 지낼 만해? 아빠 괜찮아. 아빠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 여자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아빤데. 아빠 내가 알아서 해. 엄만? 여자 늘 똑같지 뭐. 국이 좀 짜다 아빠. 아빠 엄마한테 잘해야지 니가. 여자, 숟가락을 내려놓고 여자 그건 아빠가 할 일이지. 아빤 왜 맨날 나한테 책임을 떠넘겨? 아빠 …. 여자 왜 아무 말이 없어. 아빠 … 밥 먹자. 여자,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밥을 넘기려 하는데 넘어가지 않는다. 여자 건강은 어때요. 아프면 꼬박꼬박 병원 가. 참지 말고. 아빠 알아서 한다니까. 여자 … 정말 안 들어올 거야? 아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잖니. 여자 그래서 이 다음은? 아빠 …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여자, 답답하다. 여자 집을 나갔을 땐 적어도 어떤 생각이 있는 거 아니었어? 이혼이라든가, 아님 엄마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다든가. 아빠, 말 없이 한숨만 푹 쉰다. 여자 도대체 아빤 여태까지 뭘 한 거야? 아빠 나도 할 만큼 했어. 여자 뭘 했는데? 들어나 보자. 아빠 …. 여자 다들 자기 아픈 것만 봐. 엄마도 아빠도.그 사이에서 내가 어땠을진 생각도 안 해봤을 거야 아마. (사이) 여자 아빠, 난 어렸을 때 아빠가 문단속하면서 내는 문소리가 참 안정감 있었어. 그 소리를 듣고 자려고 밤늦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고. 아빠 출근할 때 뽀뽀 세례를 하면서 따가운 수염을 느끼는 것도 참 즐거웠던 기억이 나. 생각해보면 아빠랑 좋은 기억들도 많은데 언젠가부터 이상하게 그런 기억들은 다 잊혀지더라. 아빠 미안하다. 여자 뭐가? 뭐가 미안한데? 아빠 그냥, 다…. 여자 이것 봐. 아빤 또 그래. 나 학교 다닐 때 뭐가 제일 부러웠는지 알아? 엄마 아빠랑 진로 상담하는 거, 공부하라고 잔소리 듣는 거.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라, 착한 마음을 가져라. 이런 조언 듣는 거. 다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야. 아빠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여자 근데 아빠, 엄마만 궁금해? 나는 안 궁금하고? 아빠 궁금하지 왜 안 궁금하겠니. 여자 그럼 물어봐야지. 난 아빠가 내 걱정하는 걸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아. 맨날 엄마, 엄마, 엄마! 그렇게 엄말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상황을 이 지경까지 만들어? 아빠 모르니까! 나도 답답해 미칠 것 같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는 걸 어떡하니. 좋은 아빠가 되는 방법, 좋은 남편이 되는 방법, 좋은 가장이 되는 방법. 아무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
여자 그러게…. 나도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어 아빠. (사이) 여자 아빨 이해하는 방법을. 근데 지금은 아빨 이해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그러기엔 아빠, 엄마가 너무 아파. (사이) 여자 가볼게요. 식사 꼭 챙겨드세요. 여자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아빠의 태도, 성격, 표정 그 무엇하나도…. 내 안에 싸움이 일어난다. 바레즈가 사용했던 음악안의 사이렌소리와 비슷하다. 소리를 음악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고민처럼, 내 안에 투둑투둑 걸리는 이 불편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다.
7. 베베른(Anton von Webern)-피아노 변주곡(Variations for Piano, Op. 27) 여자, 일어나면 뚜껑이 반쯤 열린 피아노에 승현이 앉아 있다. 승현, 피아노를 장난스럽게 친다. 여자 승현아, 선생님은 오늘도 예전에 살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아빠에게 하지 말았어야 할 말들을 퍼붓고 왔거든. 승현, '도'음을 계속 치다가 이따금씩 '레'음을 친다. 여자 승현아, 난 니가 '도'를 찾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면 해. 너라도 자유롭게 살았음 하는데… 그건 내 욕심일까? 여자, 피아노를 치고 있는 승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여자 나도 너처럼 살고 싶은데…. 이 수많은 기준과 잣대에서 벗어나 나만의 기준으로 살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여자, 승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여자 처음에 음악 공부를 시작할 때도 그랬어. 대학에 입학하고 첫 연주 수업에 선배들이 작곡한 곡이라고 듣고 있는데, 팔뚝으로 피아노를 내려치고, 바이올린 활대로 연주하고 아주 기괴한 모습이었지. 근데 승현아, 아주 재밌는 건 말이야, 기괴하다고 생각했던 그 음악을 내가 하고 있더라는 거야. 베베른의 피아노 변주곡을 아주 재미나게 듣고, 또 새로운 연주법을 연구하고. 난 아주 본능적으로 느꼈는지도 몰라. 이런 음악이야말로 날 자유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이제 음악뿐만이 아니라 나도 자유로워져야 할 때인 것 같아. 승현, 다시 피아노의 다른 음을 친다. 여자 널 보고 있으면, 안정이 돼. 예전엔 갖지 못했던 것들이 이젠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마 널 보고 깨달은 거겠지. 승현, 여자를 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여자, 승현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춘다. 여자 그래, 아직 겁이 나서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있었어.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8. 바그너 (Wagner)-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Tristan und Isolde-Prelude) 여자가 일어나면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 웬일이야? 여자 수척해 보인다. 남자 그럼 내가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니. 여자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남자 무슨 일이야? (사이) 여자 우리가 그런 거 물어야 하는 사이야? 남자 … 어떻게 지내? 여자 그러게…. 어떻게 지내는지 나도 잘 모르겠네. (사이) 여자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서. 남자 뭐가? 여자 우리 사이. 남자 … 우리 사이? 여자 … 너도 알겠지만 난 참 겁이 많은 애야.구구절절 너에게 설명할 순 없지만, 난 그래.그래서 널 만나면서도 우리가 헤어진 뒤를 생각했었나봐. 헤어지고 나서의 후유증 같은 거. 남자 …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여자 당장 변한다고 확신하지는 못해. 그래서 기다려달라고도 못하겠고. 근데, 분명한 건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졌단 거야. 남자 … 지금 내가 널 기다려 준다고 얘기해야 하는 거지? (사이) 남자 미안하다. 난 이제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이고 남자의 이야기를 들은 여자, 고개를 들으며 여자 그래, 이해해. (사이) 여자,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여자 견딜 만하다. 나 견딜 만한 것 같아. 남자 …혹시 내가 너한테 전화를 한다면, 그때 꼭 받아라. 그땐 나도 널 견딜 만하다는 뜻일 거야. 여자: 고마웠어. 날 사랑해 줘서. 이제 나, 너 없이 날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한번 해 보려고. 남자 그래, 잘 생각했다. 니 안에서 끊임없이 빛나고 있던 모습을 발견하길 바라. 여자 생각보다 견딜 만하다. 그와 이별하는 것이 죽을 것처럼 힘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견딜 만하다. 아름다운 화성을 무너뜨리며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낸 바그너처럼, 나도 이제 내 안의 낡은 성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 여자와 남자, 서로 뒤돌아 간다.
9. 드뷔시(Claude Debussy)-달빛(clair de lune) 남자는 퇴장하고 무대는 여자의 집으로 바뀌어 있다. 활짝 열린 피아노 뚜껑 밑에 싱싱한 꽃 한 송이가 꽂혀 있다. 무대 위에 엄마가 멍하게 있다. 여자가 오는 것을 보고는 퇴장하려 한다. 여자 (다급하게) 엄마! 엄마, 걸음을 멈춘다. 여자 … 엄마, 나랑 술 한잔 할래? 이 말을 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네. (사이) 엄마, 뒤돌아본다. 엄마 아니, 오늘은 술을 안 마셔도 잠이 잘 올 것 같아. 엄마 뒤돌아 몇 발걸음 가다가 다시 뒤돌아 여자를 보며 엄마 … 고맙다. 엄마, 퇴장한다. 여자, 관객석을 바라본다.
10. 드뷔시(Claude Debussy)-달빛(clair de lune) 여자 폭풍이 이렇게 끝난다. 아니 끝인지, 시작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호수에 비치는 달빛을 표현한 드뷔시의 '달빛' 같은 음악이 내 안에 계속 잔잔하게 흐르길 바랄 뿐이다. 막이 내린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 출처 : 조선일보 | 입력 : 2015.01.01 03: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