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혜택받은 집단…국민이 자꾸 간섭하고 태클 걸어야”/ 류영재(시각디자인학과 01) 동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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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사태 때 목소리 높이고 만화가 되고 싶어 디자인학과 진학 “판사는 많은 환경적 혜택 받은 사람
류영재 춘천지법 판사는 “오랫동안 판사로 남고 싶어서 사법농단 진상 규명 활동에 적극 나서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지난 18일 춘천지법 앞에서 류 판사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지난 18일 근무시간이 끝나는 때에 맞춰 그가 일하는 춘천지방법원을 찾았다.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나눠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다소 긴장됐는데, 류영재 판사 역시 음악인을 만나는 경험은 ‘거리의 만찬’ 녹화를 같이한 자우림의 김윤아 다음으로 내가 두번째라며 조심스러워했다. “판사가 3천명인데 왜 굳이 네가” “어제 좀 힘든 하루였어요. 전날 재판 준비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고 오전, 오후 내내 재판을 했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좀 늦게 8시쯤 일어났어요. 출근 전에 제가 키우는 앵무새 두마리가 다퉜는지 다리에 상처가 나서 약을 발라주느라 시간이 좀 지체됐어요.(웃음) 9시쯤 출근해서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면서 워밍업을 했어요. 오늘의 일정 확인 같은 것도 하고. 오늘은 조정이 3건 있었어요. 오전에 1건, 오후에 2건.” ―조정이 뭔가요? “법원의 판결 없이 두 당사자가 서로 양보하여 당사자의 합의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조정이라고 해요. 저는 조정할 때 기본적으로 당사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보라고 해요. 오랫동안 여러 사건을 다루면서 알게 된 것은 똑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양쪽 당사자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지만 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다만 해석이 서로 다르거나 생략되는 몇가지 부분이 있는 거죠. 양쪽 이야기를 다 듣느라 조정은 시간이 오래 걸려요.” 법원에서도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대법원. 그곳의 수장이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공사를 사익을 위해 사용했다. 여러 재판에 공정하지 못한 관여를 했고, 청와대와 거래를 했으며, 사법행정권을 남용했다. 그런 사실들이 이탄희 전 판사를 통해 처음 드러났다. 그는 2017년 2월 기획심의관 발령을 받고 법원행정처에 출근했다가 자신의 업무가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튿날 사표를 내며 문제를 제기했고, 이는 법원행정처의 어두운 민낯을 드러내는 촉매제가 됐다. 류영재 판사 또한 그때부터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던 페이스북 계정을 포함해 여러 신문 지면에 사법농단의 문제점을 알리고, 얼굴을 드러내며 언론 인터뷰를 했다. 또 사법농단을 계기로 2018년 4월 정식 기구가 된 전국법관대표회의에 춘천지법 대표판사로 2년간 활동해왔다. ―사법농단 사건 때문에 여러모로 힘드셨죠? “사법농단은 판사들한테도 정말 큰 상처였어요. 어느 집단이든 권력지향적이고 사익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래도 법원이 그중에 제일 낫다, 이런 생각들이 판사들 사이에 있고 서로에 대한 믿음도 있어요. 그런데 그 신뢰를 완전히 무너트리는 일이 터진 거죠. 그래서 저도 그렇고 다른 판사님들도 그렇고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건 무조건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목소리를 냈어요. 저 같은 경우는 그때 페이스북에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래서 언론에서 연락이 많이 왔어요. 인터뷰하기 시작하니까 저를 찾는 곳이 끝도 없더라고요.(웃음)”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겠어요. “부모님이 걱정 많이 하셨어요. 보수적인 대구 분들이시고, 저를 비판하는 언론을 많이 접하셨거든요. 판사가 3천명인데 굳이 네가 나서야겠냐는 말씀을 많이 하셨죠. 그런데 모두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말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면 아무도 말을 못 해요.” 내가 잘 살기 위해 말한 것 ―저도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데 늘 어떤 한계를 맞닥뜨리게 돼요. 제 정의감 속에서 항상 기회주의적인 비겁함을 봐요.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도 겁이 나서 입을 다물게 될 때도 되게 많고요. “저도 그리 정의롭지 않아요. 우리 사회의 윤리나 도덕적인 잣대에 대해서도 항상 회의하는 편이고 대체 뭐가 정의인지도 모르겠어요. 저 역시 입 다물 때가 얼마나 많은데요.(웃음) 다만 어떤 일에서는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는 것 같아요. 이건 너무나도 엄청나게 잘못된 일이라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결심하게 되는 순간요. 그리고 이건 저를 위해서 한 행동이기도 해요.” 그는 ‘계산’을 했다고 했다. 목소리를 냈을 때의 상황과 안 냈을 때의 상황을 비교해서 어느 경우에 자신이 더 힘들지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그렇게 낸 목소리라고 했다. “보통 나서지 말라는 것은 판사로서 잘 살 수 있기 위해서인데, 만약에 제가 가만히 있어서 국민이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사법농단이) 어물쩍 넘어갔다면 저는 법원을 나왔을 거예요. 저는 오랫동안 판사로 남아 있고 싶거든요. 제 실익을 위해서 한 거예요. 자신이 얼마큼 뒷감당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비겁한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나중에 보상심리가 안 생겨요.” ―사법농단 사건 때문에 판사들이나 재판에 대한 신뢰도 자체가 많이 낮아진 것 같아요. “네, 확실하게 느껴져요. 지인인 변호사들이 가끔 자신들이 들어가는 재판의 공정성이 의심된다고 제게 하소연할 때도 있고, 또 패소 당사자들께서 불복하며 재판부를 믿을 수 없단 반응을 보이는 빈도도 늘어난 것 같아요. 나아가 정치권과 언론도 요즘은 재판 결과를 놓고 문재인 대통령의 압박에 굴복했다는 식으로 논평하기도 하고요. 전반적으로 재판을 왜 믿어야 하는가 의문을 제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류 판사는 무엇보다 가장 속상한 것이 사법농단을 정치적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법농단이 처음 터진 것은 2017년 2월, 판사들이 내부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게 2017년 3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기 전이다. “자꾸 이 문제를 정치적 이슈로 바라보면서 마치 문재인 대통령의 ‘지령’을 받아서 판사 일부가 적폐청산이라는 명목하에 권력교체를 꾀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말 황당해요. 재판 당사자들이 정치적 정체성을 부여해 저를 오해한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하면 무척 괴로워요.” ―정치적 정체성을 덧씌우는 것이요? ―왜 헌법 대 반헌법의 문제라는 거죠? “국회의원들과 접촉한 것, 청와대와 재판에 대해 상의한 것, 판사를 관료화시켜서 다른 조직과 협상시키고 그런 것들 다 위헌이죠. 삼권분립에 반하고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에 다 반하는 일이에요.” 지난 18일 퇴근 뒤 춘천지법 근처 카페에서 만난 류 판사 모습. 부모 반대 무릅쓰고 꿈 좇다가 ‘쫄망’ 사법농단 이야기에 여전히 뜨겁게 목소리를 높이는 이 법관의 꿈이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만화가였다는 것은 뜻밖이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줄곧 만화가의 꿈을 꾸었다고 했다. 만화가가 되기 위해 깊이 있는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대원외고에 진학했지만 본인이 생각했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그런 학교가 아니었다는 데 실망했단다. “전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대학입시에 그다지 관심 없는 중학생 시절을 보냈거든요.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 애니메이션에 특화된 고등학교에 갈까 특목고를 갈까 하다가…. (대원외고가) 대입과 상관없이 좀 더 수준 높은 공부를 하는 곳인 줄 알았어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키팅 선생님 같은 사람과 공부하게 될 줄 알았던 거죠.” 고2 때부터는 미대에 진학할 준비를 했다고 한다. 만화가가 되려면 시각디자인과에 가라는 미술학원의 지도에 따라 그는 국민대 시각디자인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면서 만화도, 디자인도 포기하고 갑자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만화가를 꿈꾸고 디자인 전공을 하다가 중간에 재능 없음을 깨닫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그 포인트가 너무 뜬금없는 것 아닌가요?(웃음) “만화는 대학교 2학년 때쯤 포기했어요. 그때가 우리나라 출판만화계 위기의 시절이었거든요. 이정애, 유시진, 김혜린 작가 등 존경하던 만화가 선생님들이 다 절필 선언 하고 그랬었어요. 디자인은 졸업 때까지 나름 열심히 해봤는데, 영 자질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 스스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요. 졸업을 앞두고 마케팅 쪽으로 입사할까 했는데 대기업 면접에서도 떨어졌고요. 다들 이력이 특이하다, 대단하다 말하는데 이제 와서 그런 거지 그 당시에는 그냥 실패한 인생이었어요. 그때까지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내 맘대로 걸어왔는데 완전 쫄딱 망한 거죠. 그때 아버지가 사법시험을 제안하신 거예요. 딱 3년 지원해주겠다고. 그게 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죠. 근데 막상 해보니까 법 공부가 재미있던데요. 요조씨도 해보면 의외로 재미있어할걸요.” ―그럴 리가요. 대체 어떤 부분이 재미있었나요? “법은 사람의 욕망을 다루죠. 민법 같은 경우는 돈을 둘러싼 욕망이라고 강하게 느껴져요. 개인적으론 돈이나 재화, 권리나 의무를 둘러싼 욕망이죠. 형법 같은 경우는 공동체에 피해를 끼치고 싶은 욕망과 그것을 제어하고 싶은 욕망이 부딪치는 거고요. 헌법은 더 큰 의미죠. 우리 공동체를 어떻게 설계해나갈 것인가의 얘기이고. 기본적으로 다루는 게 우리 사는 얘기예요. 당연히 논리적으로 완벽하지도 않고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거죠. 저는 그런 게 너무 좋고 재미있는 거예요. 이토록 현실적인 것이. 그리고 또 좋았던 게 뭔 줄 아세요?” ―뭔데요? “저는 법 공부 하기 전에는 처벌법만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법이 되게 싫었어요. 왜냐하면 국가가 나를 혼내는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데 실제로 들여다보면 법은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것들이 더 많아요. 보호받으려면 법이랑 친해지는 게 중요해요. 법이라는 건 우리 공동체에서 나를 보호하면서 살기 위해 알아야 할 규칙 같은 거예요.” ―듣고 보니 확실히 법에 대한 공포가 좀 줄어드는 느낌이에요. “법은 십계명이 아니에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우리가 계속 바꿔나갈 수 있어요. 악법도 법이니까 계속 지켜야 하는가, 법으로 존재하는 한 지켜야겠지만 불변의 법칙은 아니에요. 우리가 목소리를 내서 악법을 없앨 수 있어요. 우리가 지키기로 약속한 룰, 우리가 만든 룰. 딱 그 정도의 수준인 거예요.” 다양한 사람 만나려고 페이스북 시작 ―이제 판사 몇년 차 되신 거죠? “저 이제 9년 차 됐어요.” ―잘은 모르지만 법조계가 되게 보수적이고 고루할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그 세계 안에서 류영재라는 사람은 어떤 이미지인가요? 좀 괴짜처럼 볼 것 같기도 해요. “문화 차이는 많이 느끼죠. 제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교수와 학생 사이에 위계질서가 없었어요. 친구처럼 지냈거든요. 그런데 이곳은 제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예의가 섬세하고 촘촘하게 있어요. 단적인 예로 우리는 점심의 자율이 없었어요. (재판장과 배석판사 2명이) 점심을 늘 같이 먹어야 하는 거예요. 저는 그게 좀 당황스러워서 2014년쯤에 점심 자율을 주장했어요. 그때 부장님들(부장판사=재판장)이 쇼크를 받으셨죠.” ―그래서 개선이 되었나요? 이제 점심 따로 먹어도 돼요? “조금씩 개선이 되고 있어요. 이제 일주일에 한번은 따로 먹는 걸로 바뀌었어요. 제가 약간 여기에서 이질적인 느낌이 있죠. 아무래도 좀 튀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튀는 판결 하지 마라’고 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기본적으로 판사들이 튀는 걸 안 좋아해요. 만약에 튀더라도 엘리트가 되고 인정받는 식으로 튀고 싶어 하지 부장님이랑 점심 같이 안 먹겠다고 튀고 싶어 하진 않아요.(웃음)” ―페이스북을 보니까 다양한 사안에 두루두루 관심이 많다는 게 바로 보였어요. 애초에 페이스북을 시작한 것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서였다고요? “네. 주변을 돌아보니까 제가 만나는 사람 중 95%가 법조인이더라고요. 되게 동질적인 사람들만 만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겁이 좀 나더라고요. 내가 계속 판사들만 만나면 내 생각이 우리 사회의 일반 상식하고 통할까, 혹시 유리되지는 않을까. 그래서 페이스북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때가 2015년께였는데 한참 페미니즘이라든지 그런 이슈들이 확 나왔을 때였어요. 정말 새로웠어요. 법원 판사들이 아무도 안 하는 얘기를 여기에서는 엄청 많이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많이 배웠어요.” ―지금도 여기저기서 좋은 기사나 글들을 열심히 공유하시고 챙겨보시던데요. “법조인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판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이 정말 많이 와요. 그런데 만약 제가 그 사건의 함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재판을 하게 될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서 혐오표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요, 아직 우리나라에는 혐오표현을 다스릴 수 있는 법이 없어요. 그래서 모욕이나 명예훼손으로 걸고 들어가죠. 그런데 혐오표현이랑 명예훼손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혐오표현의 기본은 차별이에요. 예컨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이다라고 하면, 특정 인물을 향하더라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성소수자 집단 자체에 대한 차별을 깔고 있는 거예요. 혐오표현으로 피해를 본 성소수자가 현행법상 어쩔 수 없이 모욕이나 명예훼손에 관한 법을 통해 보호를 요청하더라도 그들이 바라는 것은 혐오표현의 해악을 제대로 봐주는 것일 거예요. 그런데 판사들은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혐오표현이 법적 개념으로 안 들어와 있으니까 함의를 읽기가 쉽지 않은 거죠. 그래서 그냥 한 개인의 명예가 얼마나 훼손됐냐로만 판단하기 쉽고 그렇게 되면 사회와 재판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사회 각층의 목소리에 골고루 귀를 기울여서 겉으로 드러난 문제뿐만 아니라 함의까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법조인들이 노력을 많이 해야죠.” 지난 18일 근무지인 춘천지방법원 건물 앞에 서 있는 류 판사.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91740.html ※ 이 기사는 '뉴스콘텐츠 저작권 계약'으로 저작권을 확보하여 게재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