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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국내 첫 대중예술전문학교 만든 이현만 한림연예예술고 교장 / 이현만(법 59 동문)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5개 학교를 꾸리며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이현만 교장. 사진 속 종은 홍제동 천막학교 시절부터 그와 함께 해온 ‘보물 1호’다. (photo 이구희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끼는 넘치는데 갈 곳 없는 청소년들 맘껏 재능 펼칠 터전 만들고 싶어”

고학(苦學)이란 말이 있다.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고생하며 배움’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단어의 의미를 피부로 느끼는 젊은 세대는 흔치 않다. 적어도 이현만(72) 한림연예예술고 교장의 눈엔 그렇다.

이현만 교장에겐 여러 개의 타이틀이 있다. 한림여자실업학교, 한림주부중·고등학교, 한림대안고교, 그리고 오는 3월 개교를 앞둔 한림연예예술고까지…. 그가 교장직을 맡고 있는 학교만 5개에 이른다. 이 중 한림여자실업학교와 한림주부중·고등학교는 각각 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학교, 한림대안고교는 서울시교육청의 위탁을 받아 운영되는 도시형 대안학교다. 한림연예예술고 역시 지난해 12월 100% 실기고사로 신입생을 선발한 ‘또 하나의 학력인정 학교’다. 모두 이른바 ‘정규 교육’의 울타리를 조금씩 벗어나 있다. 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그는 1937년 전남 장성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논 세 마지기 부쳐 여덟 식구 입에 풀칠하는 빠듯한 살림이었다. 그러나 부모는 공부에 목마른 아들을 위해 그중 두 마지기를 팔아 중학교 첫 학기 월사금을 마련했다. 전교 1등에게만 주어지던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 이 악물고 노력했지만 그의 성적은  3~4위권. 고향에선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그는 고학하기 위해 서울행을 선택했다. 중학교 1학년 과정을 겨우 마친 직후였다.

세탁소 심부름꾼, 구두닦이, 아이스케이크 장사, 신문배달…. 낯설고 물선 서울 땅에 이불보따리 하나 달랑 메고 상경한 후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전쟁통에 군인들이 버린 포(砲) 바퀴와 널빤지로 만든 이동식 리어카가 그의 잠자리였다. 청계천변 일대 폐가촌에서 동가식서가숙하던 그에게 누군가 귀띔했다. “남산에 가면 공부할 수 있는 곳이 있다더라.” 상경한 지 2년여째, 그렇게 다시 학업을 시작했다. 정부지원으로 세워진 무상교육기관 남산직업소년학교가 그의 배움터였다.

남산직업소년학교에서 중학교 과정을 마쳤지만 학업을 잇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학비를 벌어 진학해야 했던 터라 고교 시절 내내 휴학과 복학, 전학을 밥 먹듯 했다. 대학(국민대 법학과) 진학 후엔 “서울 가서 꼭 판·검사 하라”던 고향 은사의 말을 떠올리며 고시공부에 전념했다. 그러나 스물 셋 되던 해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와 같이 어려운 처지에서 고학하는 이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첫 무대는 당시 그가 살던 서대문구 홍제동 판자촌이었다.

1960년 4월 3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산 37번지. 그가 만든 첫 번째 학교가 문을 열었다. ‘학교’라지만 천막과 낡은 책걸상, 칠판이 전부였다. 고교 때부터 해왔던 신문사 지국 일로 번 돈을 털어 만든 시설이었다. 교사는 그를 비롯, 여기저기서 불러들인 대학생들이 맡았다. 무료로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이곳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재학생은 한때 500명까지 불어났다.

무허가로 사용하던 홍제동 학교 터가 사유화되며 학교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그에겐 운이 따랐다. 맞선 자리에서 대뜸 “나는 학교(사업) 할 사람”이라고 엄포를 놨던 서른넷 노총각을 말없이 남편으로 맞아 내조한 아내가 있었고 “좋은 일 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며 송파구 장지동에 사뒀던 부지를 선뜻 빌려준 동서가 있었다. “벽돌 짓는 데 쓰라”며 부대 모래를 트럭으로 날라준 군인이 있었는가 하면 지붕 올릴 돈이 없어 쩔쩔맬 때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은 미8군장교부인회도 있었다.

 
50명 겨우 모아놓고 국어·영어는 아내가, 수학·사회는 그가 도맡아 가르쳤던 학교 규모는 점차 커졌다. 수업료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대신 학교부지 한편에 양계장을 차리고 닭이며 계란을 팔았다. 오동나무·산수유나무 묘목을 재배하고 염소도 쳤다. 번 돈은 고스란히 학교 운영에 들어갔다. 교사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로 충당했다. 당시 고려대 자진근로반 학생을 비롯, 많을 땐 70여명의 대학생이 교단에 섰다. 이들 부부의 ‘100% 무상교육’ 원칙은 1985년까지 이어졌다.

정규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그가 한 일은 비단 학교운영뿐만이 아니었다. 40대에 늦깎이 입학한 고려대 교육대학원 시절엔 검정고시제도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은 기고문을 학보에 실었다. 검정고시 준비생의 시험 준비를 도우며 피부로 겪어온 모순이었기에 반향은 컸다. 결국 검정고시제도는 1977년 그의 제안대로 개편됐다. 1980년대엔 전국 1000여개 비정규학교를 모아 연합회를 만들고 이들이 정부로부터 인정 받을 수 있도록 백방으로 뛰었다. 그 노력의 결실로 1985년 사회교육법 시행령에 따라 각종 직업학교의 정부 인가가 이뤄졌다.

한림연예예술고는 그가 10년간 대안학교를 운영하며 지켜본 ‘요즘 애들’의 특성을 관찰한 결과 탄생했다. “사회에선 대안학교 다닌다고 하면 일단 ‘문제아’란 낙인부터 찍고 봅니다. 그러나 직접 가르쳐보면 그렇지 않아요. 국·영·수 대신 노래와 춤, 연기를 배우고 싶은 평범한 아이들일 뿐이지요. 학교가 그들을 소화하지 못하니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수요를 끌어안는 학교를 짓자, 생각했지요.”

연예과, 뮤지컬과, 실용무용과. 한림연예예술고는 3개 학과 각 한 학급씩으로 구성된다. 연기코치와 연극연출가, 뮤지컬 작곡가, 보컬 트레이너, 라틴댄스 국가대표 등 강사진은 철저하게 실무 전문가 중심으로 꾸렸다. 당초 모집정원은 135명이었지만 최종 선발된 인원은 230명.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학생들의 호응에 이 교장은 물론 학교 측도 깜짝 놀랐다. 며칠 전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행사도 가졌다. 이 교장의 둘째 아들이기도 한 이상준 부교장은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치가 높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이 대단해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이 교장은 요즘도 새벽 5시면 일어나 2㎞ 거리에 있는 학교까지 걸어서 출근한다. 별일이 없는 한 교장실을 지키며 학교 일을 보고 저녁 6시30분경 퇴근한다. 건강 유지 비결은 꾸준한 운동. 짬 날 때면 교장실 안쪽에 마련된 탁구대에서 탁구를 치며 땀을 흘린다. 잊지 않고 학교를 찾는 옛 제자들이 그의 탁구 상대다. 지난 2월 3일 만난 그는 “어제도 제자 김철호(법무부 서울동부보호관찰소장·서기관)가 찾아와서 같이 탁구를 쳤다”고 했다. 김 소장은 장지동 천막학교 1회 졸업생 출신이다.

그는 지난해 사재를 털어 교사(校舍)를 신축했다. 5개 학교 수업이 밤낮으로 원활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냉·난방시설을 비롯, 모든 환경을 새롭게 단장했다. “우리 학생들이 웬만한 정규학교보다 훨씬 더 좋은 여건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됐다”며 싱글벙글하는 그의 다음 꿈은 학점은행제로 운영되는 평생교육원을 짓는 것. “고교 졸업 후 대학생의 꿈을 품고 살아온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는 게 그 이유다.

인터뷰 말미, 그가 한 가지 부탁을 해왔다. “기자 양반, 기사 쓸 때 ‘불우청소년’이니 ‘소외계층’이니 하는 말은 쓰지 마세요. ‘재능은 있지만 적성에 맞는 교육을 받지 못해 고민하는 청소년’ 정도로 하지요. 너무 긴가요?”(웃음)

출처 : 조선일보 : 기사입력 2009-02-17 09:37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3&aid=000001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