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동섭 <1> 6·25 직후 보릿고개 속에도 온기 느끼며 성장 / 대학원 법학부 박사과정 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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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55년 11월 전남 고흥군 풍양면 한동리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17세 때 시집와 1년 뒤 나를 낳으셨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마치 여린 소녀가 아기를 키우는 것과 같은 모양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이렇게 일찍 결혼해 일찍 자녀를 갖는 분위기였다. 어머니는 나를 임신했을 때 하늘에서 하얀 비단이 내려오는 태몽을 꾸셨다. 비단에는 태극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섭아, 너는 나중에 커서 분명히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여. 용기와 소망을 잃지 말거라.” 그때는 6·25전쟁이 끝나고 2년밖에 되지 않던 상황이라 보릿고개가 있었다. 세 끼 밥을 제대로 챙겨먹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은 보리밥이나 열무김치, 쌀죽, 밀가루죽 같은 것으로 끼니를 채웠다. 그것조차도 못 먹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고 어머니가 손수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그나마 다른 가정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다른 친구들은 풀죽으로 한 끼를 때웠다. 당시 코흘리개 친구들은 등교는 고사하고 매일 땔감으로 쓸 나무를 하느라 산을 누볐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농사일에도 매달렸다. 땔감을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려워도 인정과 온기가 있었다. 지금처럼 돈 몇 푼에 생사가 오가는 그런 살벌한 사회는 아니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월급날을 잊을 수 없다. 아버지는 월급날이 되면 오토바이에 생선을 싣고 오셨다. 아버지는 당시 농촌지도소장이었기 때문에 나라에서 오토바이가 나왔다. 지금으로 따지면 중형 세단 정도의 관용차와 비슷했다. 아버지는 3년에 한 번씩 타지 발령이 났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근무지였던 전남 신안, 화순, 광양 등에서 함께 생활하셨다. 나는 자연스레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유년 시절은 할머니와 함께했던 기억이 많다. 장남인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할머니는 긴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셨다. 대나무로 만든 참빗으로 한 올 한 올 정성껏 빗어 비녀를 꽂으셨다. 할머니는 내가 졸고 있을 때면 나를 품에 안고 가슴을 토닥거리며 노래를 불러주셨다. 아버지는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만나면 당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돕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33년 공무원 재직 동안 월급을 제대로 갖다 준 적이 없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의 여인이었다. 아버지 형제가 12명이나 되고 자식이 6명이나 되는데다 맏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시부모를 모시니 그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나 깨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식 걱정, 집안 걱정으로 사셨다. 6남매 공부시키고 장가·시집보내는 데 뼈골이 다 빠질 정도로 고생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코끝이 찡해진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이처럼 온갖 고난과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어머니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약력=전남 고흥 출생.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고려대 정치학석사, 국민대 법학박사. 태권도 공인 9단. 안철수 의원 정무특보 역임. 현 순복음노원교회 장로, ㈔세계태권도선교협회 회장, 2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국민의당 원내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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