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애착이 가는 캐릭터요? <라푼젤>(2010)의 마녀죠.”
김상진(58) 애니메이션 감독의 입에서 뜻밖의 캐릭터가 튀어나왔다. 그는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일한 최초의 한국인 애니메이터(캐릭터 디자이너)다. <겨울왕국>(2013), <빅 히어로>(2014), <모아나>(2016) 등의 작품 속 캐릭터를 디자인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 캐릭터의 이름이 나온 건 의외였다.
“<라푼젤>은 마녀의 성격과 그에 맞는 외형을 찾느라 2년이나 작업했어요. 아내 친구 중 한 명을 모델로 만들면서 완성됐죠. 나중에 아내가 그분에게 (모델로 삼았다는 사실을) 얘기해줬더니 펑펑 울었대요. 너무 좋아서요.(웃음) 디즈니숍에서 마녀 인형을 사서 사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했다고 하더군요.”
지난 23일 경기도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열린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에서 김 감독을 만났다. 그는 현재 20년간의 디즈니 활동을 접고, 한국에서 장편 애니메이션 <빨간 구두와 일곱 난쟁이>를 만들고 있다.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인 로커스가 만드는 작품인데, 그는 이 회사의 이사이기도 하다.
경제학도 출신인 그는 37살에야 디즈니 스튜디오에 입성했다. 어릴 때 색약(적록색맹) 판정을 받고 미술가의 꿈을 접었다가 뒤늦게 독학으로 디자인을 공부했다. “처음엔 국내 애니메이션 하청업체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캐나다에 있는 업체를 6~7년 다녔죠. 디즈니 티브이(TV) 시리즈 하청작업을 하던 곳으로, 그때 한국에선 배울 수 없는 다양한 것을 배웠어요. 그러다가 미국 디즈니에 문을 한번 두드려봤는데 운 좋게 입사했죠.”
디자인 독학 37살때 디즈니 입사
‘겨울왕국’ ‘빅 히어로’ 등 참여
작년 디즈니 떠나 한국행 선택
토종 애니 ‘빨간 구두…’ 제작중
“라푼젤 마녀 캐릭터 가장 애착
후배들에게 배움의 기회 됐으면”
디즈니에서 처음 참여한 애니메이션은 <판타지아 2000>이었다. “디즈니에 입사했을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해요. 당시 애니메이터들을 위한 교과서 같은 책에서 보던 유명한 사람들과 복도에서 마주치고, 점심도 같이 먹고 하니까 실제 같지 않았죠.”
‘슈퍼바이저’(총감독)라는 직책까지 오르며 즐겁게 일했던 디즈니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매너리즘 때문이었다. “새로운 작품을 매번 하면서도 어느 순간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결정적인 건 차기작이 <주먹왕 랄프>, <겨울왕국> 등의 속편이라는 점이었어요. 캐릭터 디자이너에겐 주인공의 이미지가 이미 만들어진 작품은 딱히 할 게 없죠. 조연급의 캐릭터가 새로 등장하긴 하겠지만 재미가 없어요. 마침 로커스에서 제안을 해, 이참에 한국 애니메이터들과 일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싶어 한국으로 왔죠.”
<빨간 구두와 일곱 난쟁이>는 외모만 따지다 저주받아 초록색 피부의 난쟁이가 된 일곱 왕자와 순수한 마음을 지닌 용감하고 활발한 공주 ‘빨간 구두’의 이야기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현재 60% 정도 작업이 끝났고, 내년 가을께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빨간 구두의 목소리는 배우 클로이 모레츠가 맡아 일부 녹음을 끝냈다.
“해외 배급도 할 겁니다. 디즈니와 견주면 경험·인력·제작비 규모가 차이가 있죠. <빨간 구두와 일곱 난쟁이> 제작비가 200억 정도인데 미국과 비교하면 독립영화 수준이에요. 성공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다음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흥행하면 좋겠어요. 함께 작업하는 후배들에게 배움의 기회가 된다면 더없이 좋고요.”
원문보기: http://m.hani.co.kr/arti/culture/movie/816032.html?_fr=fb#c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