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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서 前 현대차 부사장 “제네시스, 새 역사 써야 성공한다” / 박종서(공업디자인학과) 前 교수

거리를 지나는 멋진 차를 보면 시선이 집중된다. 그 멋진 차에 내가 타고 있다면 마치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자동차 디자인이 특별해 보이는 이유다.

해외 명차들을 군침 흘리고 보던 시절, 우리에게는 ‘박종서’라는 스타 디자이너가 있었다. 그는 2000년대 초에 LG전자 김철호 디자인연구소장(계원예대 총장 역임), 삼성전자 정국현 디자인경영센터 상무(현 SADI 학장)와 함께 디자이너 출신으로 대기업 임원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들이 임원에 오르면서 국내 대기업에서 디자인 부서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다.

박종서 전 부사장의 작품은 스쿠프, 티뷰론, 싼타페, 투스카니 등 셀 수 없을 정도다. 그가 있었기에 현대차의 디자인 독립은 이뤄질 수 있었다.

카디자이너를 꿈꾸다 자동차 담당 기자가 된 내게 그는 새로운 영감을 주는 인물이었다. 신차 발표회나 행사 때 그이만큼 기자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주는 현대‧기아차 디자이너를 지금껏 본 적이 없다.

현대차 재직 시절 자주 얘기 나눌 수 있었던 그를 오랜만에 만난 건 2007년 1월, 미국 출장길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같이 앉으면서였다. 그 덕분에 나는 미국으로 가는 11시간의 비행시간 내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의 경험담을 들을 수 있었다.

또 다시 그가 생각난 건 고양시에 자동차 디자인 미술관 ‘FOMA(Form Of Motors and Arts)’을 세웠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그가 국민대 테크노대학원장에서 정년퇴임한 후 세운 이곳은 2016년에 문을 열었다. 얼마 전 찾은 이곳은 그동안 언론에 공개된 모습과 또 달라져 있었다. 전시작품이 계속 들어오고 업그레이드되고 있어서다. 6월의 뜨거웠던 어느 날, 미술관장으로 변신한 그와 오랜만에 마주 앉아 그간의 얘기를 들어봤다.

▲미술관은 현대차에 계실 때부터 세우기로 마음먹은 겁니까.
내가 현대차 디자인팀에 들어간 1979년에는 포니가 한참 잘 나가던 때였어요. 어느 날 포니 설계도를 들추다 한 장의 상세 도면을 보게 됐죠. ‘피아노 디 포르마(Piano di Forma, Plan of Form)’라고 평면도, 측면도 등이 있는 설계도에요. 포니를 디자인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그린 렌더링을 보고 이탈디자인 알도 만토바니 엔지니어가 만든 도면이었어요.

당시에는 디자인 콘셉트가 정해지면 아이디어 스케치부터 테이프 드로잉, 클레이 모델링 등 여덟 단계를 거치는 게 일반적인데, 이탈디자인은 네 단계 만에 이뤄졌어요. 어떻게 2차원을 보고 도면을 그리는지 참 경이로웠습니다. 이건 귀신도 할까 말까 한 시스템인 거죠. 얼마나 정밀한지 난 처음에 생산 도면인줄 알았어요.

현대차에서 국민대 대학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자동차 디자인이란 무엇일까?’라는 주제로 늘 고민했습니다. 그때마다 이상하게 포니가 떠올랐어요. 그런데 포니 도면을 찾으려하니 없어진 걸 그제야 알았어요. 울산에서 남양으로 연구소가 이사 오면서 마이크로필름이 없어진 거죠. 그걸 찾으러 이탈리아에 여러 번 갔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이탈리아 공방에서 배운 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서 미술관을 만들었죠.

▲미술관에 앞으로 새로 추가할 콘텐츠는 어떤 게 있을까요.
-지금 현대차 컬러팀이 독일 출신의 컬러리스트입니다. 우리나라 전문가가 없기 때문에 외국에서 영입해온 거예요. 우리는 모든 게 수능 위주로 교육이 이뤄지고, 요즘 미대입시는 실기도 안 봐요. 각 기업이 인적성 검사를 하는데, 거기서 불합격하면 안 뽑아요. 내 경험으로 보면 그림에 미쳐 있고, 자동차에 미쳐 있는 학생들은 여길 통과를 못해요. 오히려 수능 점수 높은 애들은 이런 걸 통과합니다.

한마디로 미술이라는 교육이 안 되고 있어요. 빛이 스펙트럼을 통해서 어떻게 분해되고 이런 걸 알아야 하는데, 컬러를 과학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습니다. 이 박물관에 컬러 관련 내용을 넣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요.

▲‘꼴, 좋다’라는 관장님의 저서를 보면 자연에서 온 디자인에 대한 해석이 참 인상적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납니다. 일반적으로 알아야 할 부분을 모르는 것도 있어요. 자연에 대해, 사계절에 대해 너무 모르죠. 자연을 관찰할 기회가 없어요.

▲2001년에 인터뷰할 때 요즘 학생들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하셨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에는 더 나빠졌어요. 학생들이 선으로 그림을 안 그려요. 유명 디자이너들은 전부 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거든요. 컴퓨터 작업은 원래 그 이후에 하는 거예요. 요즘 학생들은 스케치북이 없어요. 전기가 없으면 그림을 못 그린다고 합니다.

▲예전에 디자이너도 외국어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는데.
-어릴 때부터 영어를 열심히 해서 그런지 영어 잘하는 사람은 많아요, 그런데 독일어, 프랑스어 등 제 2외국어는 아직도 부족한 학생이 많습니다.

▲관장님 디자인 중에 저는 티뷰론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티뷰론은 너무 일찍 나온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는 미쓰비시 엔진으로 FF(앞바퀴굴림) 구조에 맞춰야 해서 프런트 오버행이 너무 길었어요. 그게 참 한스러웠어요. 조만간 티뷰론을 세르지오 스칼리에티가 설계했던 방식으로 다시 해석할 겁니다.

지금 신차를 디자인하라고 하면 작은 차를 만들고 싶어요. 쓸 데 없는 부분을 다 떼어버리고 과장되지 않게 말이죠. 지금 차들은 너무 크잖아요. 헤드램프도 필요 없는 부분도 다 버리고 필요한 부분만. 그러면 명차가 될 거 같아요.

▲요즘 현대‧기아차의 디자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전에 비해 아주 좋아졌습니다. 자동차회사는 차가 일단 잘 팔려야 되요. 예전에는 우리 손으로 모든 걸 우리가 해야 한다는 게 강조됐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피터 슈라이어나 루크 동커볼케, 이상엽 부사장을 데려 오는 건 이해가 됩니다.

▲제 기억에는 루크 동커볼케가 온 지 1년 반 정도, 이상엽 부사장이 온 지 1년 정도인데, 최근 행사에서 이 분들이 신차의 디자인을 설명하거든요. 조금 의아스럽습니다. 디자인 개발은 그 이전에 완성됐을 텐데요.
-정확하게 보셨어요. 마치 콘베이어 벨트처럼 자기 분야만 딱 디자인하고 넘기는 시스템이에요. 그러니 ‘이 차는 내가 디자인했다’라고 말하기 참 힘든 시기죠. 근데 요즘에는 스타가 없는 시대에요. 루크 동커볼케나 이상엽 부사장이 전체를 다 하지는 않았더라도, 전체적인 컨트롤은 했을 거예요. 회사 입장에서 마케팅 효과도 생각했을 것이고.

▲YF 쏘나타를 디자인했던 GM 출신의 필 잭슨이 다시 GM으로 돌아간 이후로 ‘플루이딩 스컬프처’라는 디자인 언어는 사라졌고, 현대차 디자인의 혼란기인 것도 같습니다.
-누군가는 디자인을 구축해야 하는데, 손님이 와서 그걸 구축할 수는 없어요. 진정으로 미래를 걱정하는 건 CEO에요. 정의선 부회장이 보는 시각이 정확할 겁니다.

▲이안 칼럼은 저에게 “럭셔리 브랜드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제네시스가 신흥 럭셔리 브랜드의 약점을 딛고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새로운 철학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프라다, 에르메스와 손잡는다고 명품이 되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과거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러면 품질이 최고가 되어야 하는데, 디자이너의 그림만으로 메워지는 건 아니에요. 세상에 복잡한 명품은 없습니다. 장식으로 내세우려고 하면 안 돼요. 각을 딱 세우고 이런 게 명품이 아니에요. 어느 정도 곡률을 주고 하면 자연스럽게 빛납니다.

오랜 명차인 페라리 같은 브랜드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우리 미술관에 전시된 페라리 250 테스타로사 같은 거죠. 오스카 스칼리에티가 그의 부친이 차를 만들던 얘기를 해주는 걸 들어보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현대차가 명차를 만들고자 한다면, 과거를 돌아봐야 합니다.

박종서 관장은 인터뷰 말미에 그가 최근 펴낸 저서를 보여줬다. ‘알 미오 카포(Al mio Capo, 나의 대장을 위하여)’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은 고(故) 정세영 명예회장을 기리는 ‘포니정홀’에 마련된 추모작품 제작과정을 다루고 있다. 정교한 목형 위에 철판을 두드려 만들던 포니의 제작공정을 그대로 재현한 그의 땀과 노력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박 관장은 헤어지면서 “임 기자, 디자인 다시 하셔야죠”라는 말을 건냈다. 카디자이너가 꿈이었던 나를 잘 알기에 전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나올 뻔했다.

FOMA는 단순히 예전 차를 전시하는 공간이 아니다. 박종서 관장은 예비 디자이너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꼼꼼히 갖추었고, 후배들과 함께 요즘 신차를 다시 해석하는 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다. 인터뷰가 진행되던 6월의 어느 날처럼, 그의 뜨거운 도전정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원문보기 : http://www.rpm9.com/news/article.html?id=2017062309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