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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동갑내기](10) 국민대학교 - 독립운동가 신익희 주도 ‘국민의 대학’…필수과목 ‘민족론’ 직접 강의

지난 1월10일부터 16일까지 국민대학교 학부생 40여명은 중국 상하이와 항저우 등지를 찾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혹독했던 독립운동사를 체험했다. 학교의 뿌리를 찾자는 뜻에서 기획된 임시정부 루트 탐방으로 국민대의 연례행사다.

국민대의 탯줄은 ‘민족’이다. 임시정부의 염원이던 독립국가 건설의 연장선상에서 태동했다. 그 중심엔 독립운동가 해공 신익희(1894~1956)가 있다.

임시정부 내무부장이던 신익희는 1945년 12월 고국으로 돌아온 직후 ‘민족 대학’ 설립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정치 현안이 산적해 있었지만, 신익희는 “과거 40년간 우리가 일제의 압박 아래 신음한 것은 국민의 무지에 비롯한 것임을 통감하고 이 나라의 중견 국민을 양성해야겠다”며 대학 설립을 천명했다.

신익희는 백범 김구의 숙소인 경교장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머리를 맞댔다. 원칙이 있었다. 대학의 설립은 독립운동가가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수뇌부인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 외무부장 조소앙 등이 고문과 회장단에 참여하고 각계 인사들이 이사진에 포진되며 ‘국민대학 설립 기성회’가 본격 발족했다.

미군정으로선 신탁통치에 적극 반대하고 나선 신익희가 눈엣가시였다. 미군정은 거센 반발 여론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모태로 교육 목표와 이념이 민족 정서와는 거리가 먼 국립대학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한 터였다.

신익희는 ‘국립’을 용인할 수 없었다. 미군정 체제로 독립국가가 건설되지 못한 현실에서 국립대학이란 말이 성립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대학 이름이 ‘국민의 대학’을 뜻하는 국민대학으로 정해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민대는 1946년 9월1일 서울 창성동에서 ‘국민대학관’이란 이름으로 정식 개교했다.

첫걸음을 뗐지만, 해방 정국에 임시정부가 그랬듯 시련과 고난이 잇따랐다. 교정을 구하지 못해 여기저기 전전하거나 강제로 건물을 철거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련 속에서 학생과 교직원은 학교를 지키기 위해 혼연일체가 됐다. 창성동 시절 건축위원회를 결성해 쓰러져가는 건물을 다시 지은 학생들의 행동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들은 신익희가 지은 국민대의 남다른 교훈 ‘이교위가 사필귀정(以校爲家 事必歸正)’을 따라 ‘학교를 내집처럼’ 위했고 ‘모든 일은 결국 정의로 귀결된다’는 신념으로 똘똘 뭉쳤다.

당시 국민대에는 타 대학에선 찾아볼 수 없는 과목이 있었다. 4학점짜리 1학년 필수과목인 ‘민족론’으로, 학장인 신익희가 직접 강의했다. 신익희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토대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실천적 봉사 정신을 고취시켰다.

제1회 국민대 졸업생이 배출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애초 1950년 5월 말 졸업식이 예정됐으나, 재단 측의 신익희 해임에 반발한 졸업생들은 신익희의 서명이 들어간 졸업장이 아니면 받을 수 없다며 졸업식을 보이콧했다. 그 결과 학생들은 문교부 승인은 없지만 신익희 서명이 들어간 졸업장을 받게 됐다. 이 졸업장은 훗날 교육 당국의 구두 승인으로 정식 인정됐다.

졸업식 날, 학생들은 현재 정부서울청사 별관으로 사용되는 창성동 교정 앞에 플라타너스 묘목을 심으며 졸업을 자축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하루 전이었다. 20년이 지난 후 1회 졸업생들은 포화 속에서도 홀로 학교를 지키며 훌쩍 자란 플라타너스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1950년대 말 국민대는 재단 분규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극심한 재정난까지 닥치면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때 대학을 되살린 인물이 성곡 김성곤(1913~1975)이었다. 국민대가 현재 재학생 2만3000여명으로 성장한 것은 김성곤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9년 재단을 인수한 김성곤은 과감한 투자로 대학 재건과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유능한 인재라면 지성과 실용적인 지식을 갖추고 민족을 위해 일해야 하며, 지배권력의 관리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분위기여야 더 큰 교육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성곡도서관, 성곡동산, 성곡장학금 등 현재 국민대 곳곳에서 김성곤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국민대 하면 조형대학을 빼놓을 수 없다. 국민대는 국내 최초로 ‘조형’이라는 명칭을 단과대학에 붙인 대학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고 김수근 교수(조형대학 초대학장)가 1975년 건축학과와 의상학과, 장식미술학과, 생활미술학과를 통합해 조형학부로 개편했고, 1980년 국민대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조형학부도 조형대학으로 거듭났다. 대규모 종합 전시회인 ‘국민대 조형전’은 그간 도시 순회전과 해외 디자인업계들과의 교류전을 거치면서 새로운 조형교육의 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대 관계자는 “인본주의, 민족주의, 문화주의, 산업주의로 대변되는 성곡의 육영이념은 국민대를 세운 해공의 건학이념인 아카데미즘, 실학주의와 맥을 같이한다”며 “이는 현재 국민대의 교육이념인 민족, 실용, 전문, 인성으로 이어져 민족 대학에서 세계 대학으로의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민과 함께 도약’ 낙후지역 배밭골을 축제의 장으로

국민대 학생들이 ‘지하세계’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학교 맞은편에 자리한 ‘배밭골’ 일대다. 학교보다 낮은 지대에 위치했다고 지하세계로 불렸다. 80여가구가 사는 배밭골은 최근까지만 해도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던 서울의 대표적인 낙후 지역이다. 원래 판자촌이었던 배밭골은 1969년 스카이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일부 개발됐지만 대부분 낙후 지역으로 남아 있다. 낙후 지역은 얼마 전까지 성북구에서 유일하게 도시가스 혜택을 받지 못한 곳이었다.

배밭골의 숙원 사업이던 가스 공급이 해결되기까지 국민대의 협조가 컸다. 2년 전 국민대 측이 구청과 주민의 요청을 받아들여 학교 사유지에 가스관을 무상으로 매설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지난 21일 오후 성북구 정릉3동 배밭골에서 ‘풍악’이 울려퍼졌다. 국민대 학생들이 사물놀이로 흥을 돋우고 장구춤 등 무용을 선보여 주민과 상인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어 주민과 학생들이 한데 모여 함께 춤을 추면서 흥은 최고조에 달했다. 국민대가 개교 70주년을 맞아 준비한 문화예술 축제 ‘배밭골 동상일몽’의 개막 공연이었다. 국민대 측이 ‘이웃 주민들과 더불어 살자’는 취지로 마련한 것이다.

김영승 배밭골번영회장(58)은 “목욕탕은 물론 문화시설 하나 없는 이곳에 우리들의 주 고객인 국민대 학생들이 직접 찾아와 잔치판을 만들어줘 흥겨웠다”며 “이런 자리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국민대 관계자는 “올해 개교 70주년이 되는 국민대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며 “인근 지역민도 함께 도약하자는 취지에서 축제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국민대는 이 축제가 배밭골 지역공동체 발전에 기여하고 주민들의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학 측은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지역 축제인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 넥스트 웨이브 페스티벌’이나, 무관심으로 버려진 공간을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프랑스 파리의 ‘상카트르’를 예로 들었다. 배밭골 축제가 문화예술과 지역사회의 대표적인 모범 협력 사례가 되고, 주민들 스스로 지역문화의 특성을 재발견해 ‘홍대앞’처럼 배밭골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출해낼 수 있길 바라는 것이다.


축제는 오는 6월까지 매달 2~3차례 이어질 예정이다. 국민대는 ‘배밭골 동상일몽’ 축제를 정례화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62115305&code=21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