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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시온의 소리] 동굴 탈출 / 이의용(교양대학) 교수
한번은 가깝게 지내는 후배 뒤를 따라가다가 그의 한쪽 어깨가 심하게 처진 걸 보게 됐다. 그 후에 봐도 그렇기에 조심스레 얘기를 해줬더니 처음 듣는다며 놀라워했다. 우리는 우리 뒷모습을 보지 못한다. 나를 뒤에서 본 사람 이야기를 들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사람들 중에는 남에게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또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남 이야기를 많이 듣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특징을 결합하면 네 가지 유형이 나온다. 첫째는 ‘동굴형’. 남에게 말을 하지도 않고 남의 말을 듣지도 않는 사람이다. 동굴 속에서 홀로 사는 사람이다. 둘째는 ‘마네킹형’. 남에게 말은 하지만 남의 말은 듣지 않거나 듣지 못하는 사람이다. 남들은 나를 구경하지만 나는 나를 볼 수 없으니 쇼윈도의 마네킹이나 마찬가지다.

셋째는 ‘간첩형’. 남에게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남의 이야기에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자기는 남에게 공개하지 않으면서 남에 대해서만 알려고 내숭을 떤다. 넷째는 ‘광장형’. 남에게 자기 이야기도 많이 하고 남의 이야기도 잘 듣는 사람이다. ‘동굴형’과 반대다. 이 가운데 나는 어느 유형에 가까울까.

네 가지 유형 가운데 소통이 잘되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사람은 광장형이다. 간첩형은 처음에는 소통이 잘되지만 곧 간첩인 게 ‘발각’돼 관계가 깨져버린다. 문제는 동굴형과 마네킹형이다. 이들은 거울을 안 보는 사람처럼 자기 모습을 잘 알지 못한다.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거나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사람을 별로 만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이들이 동굴형일 가능성이 높다.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이들은 마네킹형일 가능성이 높다. 불특정 다수에게 자주 노출돼 조명을 받는 강사, 방송인, 정치인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남들은 조명에 비친 나를 샅샅이 살펴 잘 알지만, 그들이 조명 뒤에서 말하는 내 모습은 알 수가 없다. 나에게만 집중되는 밝은 조명 때문이다. 그 상태가 깊어지면 마네킹형은 동굴형이 되고 만다.

마네킹형의 문제는 자기를 객관화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선입견이 없는 손님의 눈이어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데, 마네킹형은 늘 자기를 주관적으로만 본다. 그러니 내가 아는 ‘나’와 다른 사람이 아는 ‘나’가 다를 수밖에 없다. 마네킹형은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지만, 정작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마 7:3).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시 마네킹형들을 바라보시며, 저들이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셨다(눅 23:34).

요즘 우리 사회에 마네킹형이 자주 출몰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공동체에 엄청난 죄를 짓고도 결백을 주장하는 정치 지도자들, 약자에게 회복할 수 없는 폭력을 행하고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권력자들, 말도 안 되는 궤변과 막말로 국민을 오도하는 3류 정치인들, 나아가 사리사욕으로 교회 전체를 부패시키는 거짓 목회자들이 그들이다.

이들이 서 있는 무대 앞 객석에는 언제나 이들을 교주처럼 추앙하는 얼빠진 군중이 어김없이 모인다. 마네킹형은 조명이 비치지 않는 객석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듣지 않고 혼자 떠들기만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말하는 동안은 들을 수 없고 배울 수도 없다.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의 택시 기사가 창문을 내리며 이야기를 해준다. 뒤따라오다 보니 차에서 뭔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정비소에 들러 살펴보니, 사이드브레이크를 올린 채 달리는 바람에 브레이크패드가 많이 타버렸지 뭔가.

남의 이야기를 들어야 내 모습을 알 수 있다. 남의 눈으로 봐야 내 모습이 보인다. 마네킹형이여, 동굴형이여! 제발 종교 정치 이데올로기 학문 아집 권위주의로 막힌 불통의 동굴에서 탈출하라. 소통의 광장으로 뛰쳐나오라! 죽음의 동굴을 박차고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출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923150&code=23111413&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