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초보 운전자가 처음으로 고속도로에 나왔다. 떨리고 설렜지만 교통법규만 준수하면 된다는 생각에 교통표지판을 열심히 보며 첫 운행을 시작했다. 한참을 달리는데 폭주차량 한 대가 갑자기 그 앞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는 전속력으로 그 차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앞차와의 거리 100m’를 지키기 위해서. 방금 페이스북(페북)에서 접한 이야기다.
나는 주위 목회자들에게 페북 활동을 권유한다. 이 공간에서는 성별 나이 종교 이념 출신 정파가 다른 사람들이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이야기는 ‘좋아요’와 공감의 댓글을 얻고, 어떤 이야기는 반론과 빈정거림을 받거나 외면당한다.
무례한 매너를 보였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 엉터리 지식을 늘어놨다가 전문가들로부터 혼쭐나기도 한다. 정치인들이 일구이언을 했다가 꼼꼼한 이들로부터 ‘팩트 체크’를 당하기도 한다. 페북에는 무림 고수처럼 날선 검으로 무장한 ‘말씀의 고수’도 적지 않다. 이들과 논쟁하고 비판하고 비판 받으면서 더 넓고 깊은 신앙의 시야를 가질 수 있다.
페북은 쌍방향이다. 어느 누구의 어떤 이야기라도 ‘반응’할 수 있다. 여기서는 목회자와 목회자 간에, 목회자와 평신도 간에, 평신도와 평신도 간에, 신자와 비신자 간에 공적·사적 이슈를 두고 ‘계급장 떼고’ 논쟁을 벌일 수 있다. 잘 모르는 사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출석 교회 이슈를 이 공간에 꺼내놓고 여론에 호소하기도 한다. 교회 내에서 토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사람의 생각을 읽게 되고 자신의 생각도 다듬게 된다. 정작 자기 교회 담임목회자는 만나지 못하지만, 여기서는 다른 교회 목회자와 개인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목회자들에게 페북을 권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이버 공간도 이제 엄연한 삶의 공간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야말로 ‘땅끝’이자 새로운 사역의 공간이다. 아프리카 선교지나 마찬가지다. 사이버 공간은 전도의 황금어장이 될 수도 있다. 이제 목회자들은 ‘강대상 설교’ ‘방송 설교’에 만족해하지 말고 유튜브나 페북, 트위터 등에서도 비신자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아멘’은 아니더라도 수많은 ‘좋아요’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여러 목회자들이 페북에 진출해 삶에 지친 신자와 비신자들에게 생명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반면 공감하기 어려운 억지 주장으로 외면당하거나 비판받는 이들도 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여러 글을 읽기만 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목회자들은 대개 일주일 내내 교회에 갇혀 산다. 신자들은 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목회자들은 교회라는 성에서 세상 물정을 모르고 살아가기 쉽다. 그래서 교인들의 삶과는 유리된 종교적인 어휘로 메시지를 채우기 쉽다. 목회자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는 사명자다. 페북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갔으면 좋겠다.
페북을 보면 목회자 중에 ‘천동설’을 믿는 이들이 많다.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고 목회자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거기에다 교회 안은 거룩하고 교회 바깥은 속되다는 이분법까지.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듯, 세상에 교회는 세상의 변방에 불과하다. 신앙인은 성경과 함께 세상도 잘 알아야 한다. 텍스트(text)만이 아니라 삶의 정황(context)도 잘 읽어야 한다. 말씀을 묵상하는 만큼 세상도 묵상해야 한다. 교회의 현주소가 세상이기 때문이다.
음주운전을 단속하기에 창문을 내리고 “저는 목사입니다”라고 했더니, 아무 대꾸도 없이 “부쇼!”라고 하더라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제 ‘목사’라는 타이틀만으로 목회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차제에 신학대학원에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반 학기만이라도 택시운전, 건설현장 막노동, 음식점 서빙 같은 육체노동을 체험하게 하면 어떨까. 세상 물정을 익힌 뒤 목회 현장에 내보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경만 알아서는 안 되고, 성경 바깥세상도 잘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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