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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시온의 소리] 좋아요! / 이의용(교양대학) 교수

 
난 강의하고 글 쓰는 일이 참 좋다. 내 강의를 듣고, 내 글을 읽은 이들이 ‘좋아요’를 표현해줄 때 특히 좋다. 그러나 청중과 독자는 반응에 인색하다. 여성보다 남성이, 청년보다는 중장년이 반응에 인색하다. 또 사회적 지위나 학력이 높을수록 더 인색하다. 자발성 없이 강제로 참여한 경우에 더 그렇다. 이러한 조건들을 두루 겸비한 나이 많고 지위 높은 이들, 반강제적으로 강의를 듣는 이들은 정말 두려운 청중이다. 설교자들은 “아멘”이라도 강요할 수 있지.

세상에서 공감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엄마다. 아빠는 아직 말을 못 하는 아이를 돌보다가 아이가 울면 “왜 그래?”라는 말만 반복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러나 엄마 손으로 옮겨지면 울던 아이가 금세 울음을 그친다. 아빠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러나고 만다. “아이도 하나 제대로 못 본다”는 핀잔을 들으며.

그러나 아이의 언어 소통 역량이 커지면서 엄마와 아이의 공감대는 오히려 점점 더 약해지는 것 같다. 집에 놀러온 엄마 친구들의 얘기 소리에 아이가 투덜댄다.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 하겠네.”

이 말을 들은 엄마들의 반응은 어떨까. “이 녀석아, 공부하는 아이는 시장 바닥에 데려다 놔도 공부해.” 공감 역량이 낮은 엄마다. “그래? 시끄럽다고?” 공감 역량이 보통은 되는 엄마다. 그런데 조용히 친구들을 데리고 나가주는 엄마가 있다. 말 안 해도 통하는 공감 역량 최고의 엄마다. 반면 아무 반응 없이 계속 떠드는 엄마가 있다. 공감 역량 최악의 엄마다.

영어로 ‘동감(同感)’은 ‘sympathy’, ‘공감(共感)’은 ‘empathy’라 한다. 동감은 ‘함께 느낀다(feeling with)’, 공감은 ‘감정을 이입한다(feeling into)’는 뜻을 갖고 있다. ‘with’와 ‘into’의 차이는 크다. 상대방 마음으로 들어가 그의 입장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게 공감이다.

어느 아내가 남편의 차를 몰고 나갔다가 접촉 사고를 냈다. 당황한 아내가 남편에게 소식을 전하자 남편이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묻는다. “차는?” 이 남자, 이 한마디 때문에 평생 고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남편은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그리고 덧붙인다. “당신만 괜찮으면 돼! 차는 고치면 되지. 이럴 때 쓰려고 보험 들었잖아.” 아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주는 센스 있는 남편. ‘역지사지’가 공감의 열쇠다.

페이스북에는 글을 읽고 ‘좋아요’ ‘최고예요’ ‘웃겨요’ ‘멋져요’ ‘슬퍼요’ ‘화나요’를 누르게 돼 있다. 댓글이 많이 달렸거나 ‘좋아요’ 등의 반응이 많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다른 사람들이 내 표현에 공감을 해줬기 때문이다. 소통은 내 생각과 감정을 상대방과, 또는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나와 공유하는 것이다.

두 개의 링이 있다. 하나는 나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이다. 두 개의 링이 겹치는 부분이 바로 공감대(共感帶)다. 공감대가 넓어져야 소통이 잘되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상사와 부하,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넓어야 한다. 목사와 장로,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 공감대가 넓어야 한다. 정치인과 국민 사이는 특히 그렇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공감대가 점점 좁아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정치인은 국민 마음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골라서 한다. 공감은 고사하고 국민의 고통마저 정치에 이용하며 국민들 사이의 공감대마저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도대체 저들은 그 나이가 되도록 가정이나 학교에서 ‘공감’ ‘화합’이란 단어를 들어본 적도 없나. 일부 타락한 목회자는 돈과 욕심, 명예욕에 빠져 연약한 교인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도대체 저들은 성직자라면서 스스로 ‘회개’도 할 줄 모르나. 제발 정치인은 아파하는 국민과, 목회자는 슬퍼하는 교인들과 ‘감정이입’이란 걸 한번 시도해보길 바란다. 큰 사고로 슬픔을 당한 이웃들을 부둥켜안고 함께 흐느껴보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장 15절)

동계올림픽이 다가오고 있다. 평창을 찾는 세계 여러 나라의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응원해주자. 북한 선수들도. 설날이 다가오고 있다. 종교, 경제 형편, 세대가 다른 친척들과 공감대를 넓히며 상대방이 ‘좋아요’를 누를 수 있는 말만 하자. 그리고 상대방의 말에 ‘좋아요’를 아낌없이 눌러주자. 그래야 하나님께서도 우리 기도에 ‘좋아요’를 눌러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