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3)원숭이가 두꺼비로 두꺼비가 달팽이로 되기 위해…우리는 그렇게 ‘술’펐나보다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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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인류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것의 하나가 아닐까? 취하는 순간 삶의 누추함은 몽롱한 눈꺼풀 밑으로 가려지고, 말리지 못할 만용은 부조리한 현실의 베일을 순식간에 벗겨버리기도 한다. 이런 힘으로 술은 매번, 마력적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황혼이면 죽지 못한 사람들이 술집에 간다”는 시인 김승희의 노래가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당이 다 있을까, ‘주당.’ 이런 한국인의 술은 당연히 소주다. 소주는 2001년 이후 ‘참이슬’이 세계 1위, ‘처음처럼’이 제3위의 판매량을 보이는데 이 순위가 장장 15년 동안 계속되고 있다. 2010년 한국 성인 한 명은 한 달 평균 5.8병의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 한반도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술들이 빚어졌다. 하지만 소규모의 향토주들은 일제강점기 당시 주세와 음주세, 나아가 1917년 일본인에 의해 대단위 주류 제조업 공장이 각 지방에 들어서면서 사양길로 접어든다. 해방 후에는 1965년 정부의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순곡주 대신 희석식 소주가 나오고, 도수가 35도에서 25도로 낮아진다. 1992년 ‘지역판매제도’ 폐지, 1993년 ‘주정배정제도’를 폐지함으로써 소주 시장에는 100% 경쟁원리가 도입되었다. 소주는 현재 한국에서 ‘전시동원 품목’으로 지정되어 국가 비상사태 기간 중 방위산업으로 전환된다.
진로소주는 1924년 평남 용강군에 설립된 ‘진천양조상회’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때 남하해 1951년 부산에서 ‘금련’을, 52년에는 ‘낙동강’을 출하했으며, 54년 서울에서 ‘진로’가 탄생되었다. 진로라는 이름은 생산지인 진지(眞池)의 ‘진(眞)’과 곡식으로 소주를 증류할 때 술방울이 이슬처럼 맺히는 것에 착안하여 이슬을 뜻하는 ‘로(露)’를 선택해 지었다고 한다. 초창기 소주 상표에는 원숭이가 등장했다. 원숭이는 생김새가 사람과 비슷하고 사람의 말을 이해하며, 술을 즐기는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한반도 서북지방에서는 복신으로 추앙을 받아온 영물이었다. 화려한 색감의 둥근 원안에서 풍성한 곡식단에 둘러싸여 마주 보고 앉은 원숭이는 술이 주는 즐거운 교감을, 진로의 힘찬 한자 서체는 이런 술의 힘을 과시하는 듯하다. 52년 ‘낙동강’의 레이블에서는 학과 소나무가 한가롭다. 레이블에서 두꺼비가 원숭이를 제치고 등장하는 것은 서울로 이사한 후인 1955년부터다. 서울에서는 원숭이가 속임수와 교활함을 상징했기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두꺼비’가 원숭이 대신 발탁된 것이다. 이후 두꺼비는 수많은 프로모션과 광고의 주연이 되어 심벌 마크이자 캐릭터로서의 진가를 발휘한다. 하지만 세일즈 프로모션을 위해 황금으로까지 만들어졌던 두꺼비는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듯 그 광휘를 내내 유지하지는 못한다.
우선 1955년 제일 처음 등장한 두꺼비를 살펴보자. 울룩불룩한 몸통에 불거진 눈, 하얀 배를 내밀고 땅에 떡 버티고 있다. 두꺼비 주위는 풍성한 곡식단이 감싸고 있다. 그야말로 우리의 옛이야기 <두껍전> 속에서 간사한 여우를 꾸짖는 두꺼비 형상이다. 이런 두꺼비는 1962년 영문 로고가 들어가면서 몸통이 작아지고 울룩불룩하던 배도 단정한 선으로 수정된다. 1967년에는 레이블 형태가 둥근 원에서 네모로 바뀌고, 12년간 두꺼비를 감싸고 있던 곡식단이 사라진다. 이 당시는 정부의 양곡관리법(1965년)에 의해 쌀 주정이 수입산 주정으로 대치되면서, 현재의 희석주가 탄생된 시점이다. 두꺼비에게 풍부한 곡물을 할애할 수 없었던 전후 대한민국의 현실이 반영된 디자인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때 사용된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은 몬드리안의 그림 ‘컴포지션’에서 등장한 것이기도 하고, 근대 디자인 미학의 전형을 창출한 디자인 교육기관 ‘바우하우스’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 삼원색과 깔끔하게 정리된 동그란 원은 기계와 함께 탄생한 산업시대 기계미학의 원형이었던 것이다. 이 레이블은 7년간 계속되다가 1975년 파란색 바탕에 흰 로고를 사용하는 디자인으로 바뀐다. 이 레이블은 바닷가를 배경으로 “진로는 좋은 술을 새 병에 담았습니다. 푸른색은 의지와 희망을 상징합니다”라면서 출범한다. 푸른 바탕에 파도같이 휘날리는 느낌의 상호와 그 위에 떡 버티고 앉은 두꺼비는 푸른 희망을 주겠노라는 약속이었다. 이 디자인은 10년간 지속되다가 84년 다시 바뀐다. 모서리가 둥근 레이블이 각진 사각박스로 변하면서 세련된 느낌을 주었고, 금박의 바탕 위에는 다시 곡식 이미지가 일렁이면서, 빨간색과의 대비로 고급스러움을 지향한다. 이 상표는 80년대의 마이카 시대와 심야영업 정지 해제, 스포츠, 영화산업의 성장 등과 함께 15년 지속된다. 1998년 경기가 침체되고 경쟁이 가열되면서 소주의 도수는 25도에서 23도로 낮아지고, 한자 이름 진로는 한글이름 ‘참이슬’로 바뀐다. 레이블 전체 바탕색은 미색으로 변했고, 브랜드 ‘참진 이슬로’를 푸른 대나무가 감싸고 있다. 두꺼비는 이제 색채도 옅어져 존재감이 희미해진다. 환경문제가 대두되고, 건강이 본격 화두에 오른 시점이다. 이후 2014년에는 진로 한자도 없어지고 한글 손글씨의 자유로움 속에서, 구름이 떠가는 전원을 담은 이슬을 지고 있는 달팽이가 등장한다. 이 시기는 거의 모든 식품 산업이 청정, 그린, 무공해, 유기농법 등의 코드인 초록색으로 변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이제 두꺼비는 명암이 주는 존재감도 없어지고, 가느다란 크로키의 작은 개구리처럼 변해 한구석으로 밀려나 버리고 만다. 진로 레이블에서는 우리의 일상적 감성이 색과 형을 통해 펼쳐진다. 투박하고 강하고 진지했던 시기를 지나, 고급스러움과 풍요로움에의 지향, 그리고 이제는 건강하고 공해 없는 환경에서 느리게, 맑게 살고 싶은 마음이 많다. 또한 두꺼비가 사라져 가는 이 과정은 우리의 전설과 민담이 사라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도시가 확장되고 농촌이 전원으로 바뀌면서 옛날이야기는 당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신비스러운 힘으로 그 이야기 속에서 활약하던 동물과 식물 또한 사라지고, 만화영화와 게임에서는 로봇과 기계, 트랜스 포메이션, 하이브리드 전사들이 그 자리를 메워 갔다. 자연은 생태 순환고리에서 하나의 물리적 고리가 되어 먹거리, 애완용, 힐링의 도구로 자리매김했다. 더 이상 그들은 인간에게 꿈을 주고 동업의 관계를 맺어 존중받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정직한 고백에서 술 권하는 ‘소녀’로 이렇게 소주 레이블이 말없이 변하는 동안, 광고를 통해서 소주는 우리에게 어떻게 말을 걸어왔는가? 소주가 인기를 끌게 된 이유로 우리나라 최초의 애니메이션 광고를 꼽을 수 있다. 1959년말 ‘진로 파라다이스’라는 제목으로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로 시작되는 국내 최초의 CM송이 나왔고, 이는 당시 최고의 히트곡이어서 군대, 응원가를 비롯해 전 국민이 신만 나면 흥얼거린 멜로디였다. 이 영상은 지금 보아도 흥이 나고 여전히 따라 부르게 만든다. 이후 70~80년대 광고에서는 남성 모델이 등장해 “맑은 물, 천연의 깨끗함”을 강조하면서 진로가 진짜 좋은 물로 만든 술임을 진정성 있게 고백했고, 이후 90년대 초반까지 광고 남성 모델이 등장했다. 하지만 외환위기가 몰아닥친 1998년 ‘산소 같은 여자’ 배우 이영애가 모델로 등장한다. “오늘 밤 한잔 해요”라는 카피와 함께. 이 광고를 시발점으로 소주 광고는 특급 탤런트, 모델들이 거쳐 가야 할 장이 되어버린다. 이후 “흔들어라, 흔들수록 더 순해진다” 등의 더 과격하게 우리의 무의식에 호소하는 임베딩(Imbedding) 문구, 아슬아슬한 노출로 더 자극적인 아이돌 그룹이 경쟁을 하더니, 이제는 국민 여동생이란 별명을 지닌 소녀티 나는 여성이 한잔하자고 권한다. 광고는 제품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광고는 그 제품을 통해 얻게 될 사람들 간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그렇기에 광고는 100% 소비자의 결핍된 욕망을 파고든다. 깨끗한 여자, 섹시한 여자, 어린 소녀. 그들이 권하는 술. 무언가 많이 보고 듣던 코드 아닌가? 지금도 종종 매스컴에 등장해 사회를 경악하게 하는 상류층의 술 문화를 대중들은 단지 이미지만을 통해 즐기는 것이다. 매상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어떤 상상력도, 콘셉트도 없이 노골적인 성 코드만 반복되는 이 광고들은 결국 돈만 벌면 그만인 세계 13위 경제 대국이 만들어 내는 문화의 민낯이다. 소주는 산업화의 기적을 이끌어 낸 대한민국 남성의 노동과 고달픔의 동반자로서의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전 세계 증류주 중에서 값은 가장 싸지만, 결코 값싼 싸구려 술이 아니다. 그러나 광고는 싸구려다. 소주 시장은 세계 1위 판매량을 지닌 막강한 영토이다. 이제 더 낮은 도수로 어린 여성들을 겨냥한 광고에서는 꽃미남이 등장한다. 20년간 되풀이하는, 진부한 성적인 코드로 또 판매량만을 올릴지, 아니면 진정 콘셉트 있는 광고로 상상력이 돋보이고, 문화의 시대에 걸맞은 품위 있는 기업문화를 제시할지 기대되는 시점이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161956335&code=960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