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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 (12) 초등 1학년 국어교과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ㆍ어른들이 ‘의도’ 한대로 세상을 읽었던 우리들의 1학년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로 구분하고 있다. 상상계는 유아기의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세계로 어머니와 연결된 채 자아가 분열 없이 존재하는 세계다. 상징계는 언어를 중심으로 법과 질서, 관습 등으로 이뤄진 현실세계이다. 어린이가 이 세계에 진입하기를 거부하면 피터 팬처럼 영원히 아이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이 세계로 들어가면 이미 만들어져 있는 질서에 속박되며 억압받을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는 상상계를 벗어나 이러한 상징계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타인과 나의 욕망 사이에서 조절과 포기를 배워가는 과정의 첫 단계일 것이다. 당연히 초등학교 교과서 중 언어를 가르치는 국어교과서는 상징계적 요소들의 주조로 이뤄져 있다. 하지만 유년의 우리는 여전히 어머니의 품에서 세상이 우리 편이라고 믿으며 이 상징을 마치 상상처럼 받아들였기에, 상징계의 질서가 원하는 대로 성장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의 초등학교 교과서는 예체능계를 제외하고 모든 과목이 국정교과서이다. 교과서는 사회전반의 가치와 질서를 제시하지만 특히 국정교과서에는 당연히 당대 정부가 강조한 국책이 그대로 반영된다. 한 예로 경제발전과 산업화가 과제였던 1963년에서 1972년까지는 자주성, 생산성, 효용성과 새마을정신이 강조되었다. 1973년 유신헌법 이후 1980년까지는 국민교육헌장의 이념과 유신이념을 강조하는 것이 교육목표였다. 1997년 7차 교육과정의 목표는 창의적 능력의 배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수시 개정 이후 역시 이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
 

■ 통합교육에서 분과교육으로

전통사회에서 가족은 ‘감정적 공동체’라기보다는 기능적·사회적·도덕적 공동체였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질적인 지식은 공동체 내부에서 실습교육으로 습득되었다. 조선시대 평민들의 교육기관이었던 서당에서는 집단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 행동지침과 관념을 가르쳤고, 지식의 원천이며 공동체 영위에 중요한 어른을 존중하는 효와 충, 예 등은 사회 지탱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인륜적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 서당에서 사용되던 교과서는 천자문, 동몽선습, 부모은중경 등이었으며, 삽화가 들어가 이해를 돕는 경우도 많았다. 성공회대학교 교수 신영복은 ‘I am a boy. You are a girl’하고 현상을 열거하며 진행되는 서양식 언어교육과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르 황’의 단어 속에 천지와 우주의 원리를 천명하는 법칙이 담겨져 있는 천자문의 교육과정을 비교하면서, 동양에서의 지식 습득과정은 서양과는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자연과 인간의 상응 원리를 중심으로 한 통합적인 전통교육은 점차 분과학문으로 분화하기 시작했고, 교과서도 전문지식을 위한 체제로 정비되었다.
 


한국의 첫 번째 근대 국어교과서는 <신정심성소학>(1896)이다. 세로쓰기로 한자와 한글 혼용의 이야기 형식이며, ‘학교’ ‘동서남북’ 등의 생활 지식과 수신을 강조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국어교과서는 총독부가 제작한 <조선어 독본>과 일본어의 <보통학교 국어독본>이었다. 1937년 보급된 <조선어 독본 권 일>의 첫 과에는 ‘소’라는 단어와 그림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 한국인의 심성을 우직하고 일만 하는 소와 같은 심성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어로 된 <국어독본>의 첫 장은 푸른 동산이 컬러로 펼쳐지고, 단어 ‘꽃’이 가장 먼저 나온다. 1935년 출간된 <국어독본> 권 12에는 ‘일장기가 걸린 조선의 거리를 나는 간다네’하는 잘 조합된 대구와 각운으로 이루어진 시가 ‘순결’이란 제목하에 실려 있다. 

모든 예술은 형식적 특성을 통해 우리의 감각에 호소하며 다가온다. 조선의 아이들에게 일본의 초거대 상징 일장기는 그 뻔한 목적을 감춘 채, 상상같이 아름다운 운율과 알록달록한 형식으로 아름답게만 다가갔을 것이다. 또한 하늘로 광선을 뻗치면서 해가 떠오르는 그림이 유독 많이 사용되는데, 이 그림은 후에 욱일승천기의 붉은 광선, 빨간 태양으로 수렴된다. 이렇게 어리고 순수한 영혼을 전제주의 식민권력이 원하는 대로 물들이고, 이끌어 가기 위한 내용과 그림이 빈번하게 제시된 것이 일제강점기 보통학교의 국어교과서였다.


■ 영희와 철수의 등장

해방 후 첫 번째 한글 교과서 <초등국어교본>(1946) 상중하가 나왔다. 이 교과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어 독본의 양식과 비슷해 초반부에는 단어 하나에 그림 하나가 들어가고, 후반부에는 문장이 전개된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문교부에서 펴낸 국민학교용 교과서는 총 47종이었는데, 이때 펴낸 1학년 1학기 국어교과서가 바로 <바둑이와 철수>였다. 이 교과서는 ‘가갸거겨’ 글자만 학습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바둑아, 바둑아 나하고 놀자’라는 문장으로 소리, 글자, 단어, 문장을 동시에 익히도록 한 체계를 갖추었다. 표지에는 통통한 소년이 반바지를 입고 점박이 바둑이와 여동생 영희를 내려다보고 있으며, 본문은 총 12과로 되어 있다. 이 교과서에 등장한 영희와 철수는 1979년까지 가슴에 손수건을 달고, 등에는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1학년, 고학년 교과서에서는 의젓한 모습으로 등장해 내내 국어교과서의 주인공 역할을 했다. 강아지 바둑이는 이들과 함께 달구경도 가고, 눈사람도 만들면서 자연과 인간의 교감, 사랑과 정을 나타내는 상징물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는 전시생활의 이름으로 1, 2학년용 교과서 <탱크> <군함> <비행기>가 발행되었는데 그 내용이 한국군의 우세와 승리, 중공군, 공산군의 열등함으로 일관된다. “탱크가 갑니다. 민들레 곱게 핀 언덕길 넘어서 오랑캐 쳐부수러 탱크가 갑니다” 등의 시구, “이제 저 비행기가 날아가서 중공군들을 다 쏘아 죽일 거야” 등의 내용이 피란지 천막 교실 안에서 어린이들의 음성을 타고 낭랑하게 퍼졌을 것이다. 식민강점기 즐거운 운율로 일장기가 아이들에게 스며들었듯이, 또다시 전쟁의 광폭함, 어른들의 가혹한 상징계가 형식의 미학을 빌려 아이들에게 상상처럼 다가간 것이다.

종전 후 1954년부터 새로운 교과과정이 시작되었고, ‘영희와 철수’가 이번에는 컬러의 화사한 기운을 띠고 돌아왔다. 이들은 고 김태형 화백이 그린 것이다. 화가 김정은 이들을 “데생의 규격이 정확하고, 부드러운 포즈나 모범생 같은 표정이 많으며, 둥글둥글하며 구수한 맛이 서려 있어서 한국인의 특징과 분위기를 잘 살려 냈다”고 평가했다. 작고 까만 점으로 그린 눈과 반달 같은 입, 발그레한 이들의 얼굴은 마음을 저절로 따듯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들은 선생님께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란히 앉아 수업하고, 태극기와 무궁화로 동산을 꾸미면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각종 상징과 질서의 세계를 얌전하게 배운다. 영희는 상고머리도 하고, 철수는 일제강점기 교복의 모자를 쓰기도 했지만, 일장기와 탱크를 찬양하던 시구는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 엄마소도 얼룩 소 엄마 닮았네’하는 자연과 물리의 법칙을 배워주는 재밌고 따뜻한 내용으로 바뀌었다. 이 교과서 체제는 집단생활 수칙, 가족, 자연물, 계절의 네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해방 이후 2학기 교과서 말미에 계속 등장한 ‘눈’ 단원에서는 눈사람을 만드는 이들과 바둑이가 계속 나타나지만, 더 이상 눈사람 만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진 1990년대부터 ‘눈’ 단원은 사라진다.
 

■ 재주·창의성보다 휴머니즘을 먼저

1982년 시작된 제4차 교과과정에서 국어교과서는 일반 노트 크기로 커지고 영희와 철수는 퇴장했다. 이들을 대신해 여러 명의 아이들이 등장하는데, 행동 양태가 팔을 치켜들고 크게 무언가를 외치는 모습, 물구나무 선 모습, 동산에서 엎드려 노는 모습 등으로 그려진다. 이 교과서는 ‘우리 학교’ ‘재미있는 놀이’ ‘착한 어린이’ ‘즐거운 공부’의 범주로 나뉘어, 어른들이 아이에게 바라는 행동과 미덕이 정연히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교과서에는 또 ‘대통령은 나라의 어른’이라는 제목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사진이 한 페이지 전면에 게재되어 있다. 1996년 3월부터 국민학교라는 명칭은 초등학교로 바뀐다. 2013년 이후 현재 국어교과서는 ‘겪은 일, 마음, 기분, 느낌, 생각’ 등의 제목하에 감성 개발, 창의력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표지의 기차를 타고 달리는 아이들의 표정과 하는 양이 마치 유아원 정도의 수준 같아 보인다. 
 


말 없이 웃기만 하던 영희나 철수와는 달리 이 교과서 속의 아이들은 다양한 감성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도식화해 보면, 철수와 영희가 경제발전을 위해 모두가 합심해서 달려야 했던 시기, 말 없이 일관된 표정과 정형화된 자세 등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재의 교과서 속의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한껏 발랄하고 다이내믹하며 관계를 맺는 범위 역시 친구와 가족으로만 한정되어 있다. 체제 유지를 위한 집단 이데올로기나 거대한 상징이 여과 없이 들어가던 시기를 벗어나니, 이제 아이들은 발랄하게 친구들끼리만 잘 어울려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인종, 남녀노소, 모든 소수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할 다원화 사회이다. 절대적 빈곤이 아닌 상대적 박탈감이 크고, 소통은 끼리끼리의 집단들에서만 하며, 나아가 각자도생해야 하는 현 한국 사회에서 창의성이나 표현력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그 창의성을 기반으로 해야 할 깊은 인간애일 것이다. 아이들이 야단을 맞는 이유가 타인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시험을 잘못 봤다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젊은이들이 명민하지만 공동체 의식이 없어 ‘사회적 괴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언어는 곧 인식의 결정이고 주조이다. 아이들에게 단어를 부여해주고, 그것을 가르치는 형식의 결정체가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이다. 이오덕 선생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을 믿어야 한다. 어리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초등 국어교과서는 무엇보다 인간애를 기본으로 한 원칙 아래에서 다양한 가치의 집합체가 되었으면 한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181938295&code=96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