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 (13) 도심 근교 카페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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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호숫가 저 카페의 손님, 이름은 ‘향수’ 인문지리학자 이푸투안에 의하면 우리 삶의 터전은 공간(space)과 장소(place)로 나뉜다. 아직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텅 비어 있는 어떤 지점이 공간이라면 여기에 인간의 삶이 들어가 이정표와 건물이 생기고 사건이 일어나면 이 공간은 장소로 변한다. 당연히 모든 장소들은 그들만의 특유한 정체성을 지니는데, 이는 그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억과 정서에 자리 잡고 있다. 지난 70년간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은 도심화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은 근대적 기능성의 측면에서 볼 때는 비효율적이며 비생산적인 것들이, 정서의 측면에서 볼 때는 촌스러운 것들, 옛것들이 무시되고 쓸려나가는 과정이었다. 급속함이라는 단어가 이미 자연과 물리의 법칙에 어긋나는 조짐을 품고 있듯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추방된 이것들은 한 번에 사라지지 못하고, 도심의 주변에 웅성웅성 모여서 그들만의 장소성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 한국 도심 주변의 위락시설들은 옛것이면서도 비정통적이라고 낙인찍힌 것들, 모던하고 서구적인 것들의 대극점에 있는 것들의 임시 거주처이기도 하며, 수없이 썼다가 지운 양피지처럼 우리의 무의식에 찍힌 양가적인 얼룩이기도 하다. ■야산의 버섯 같은 건물들 경기 의왕시에 인공호수인 백운호수가 있다. 1953년에 만들어진 이 호수는 처음에는 농업용수용으로만 사용되었으나, 찾아오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지금은 서울 근린의 인기 있는 위락지로 꼽힌다. 위락지의 대표적인 장소는 역시 음식점이나 카페이다. 식기와 수저가 내는 달그락거리는 소리, 갓 만들어진 음식 냄새,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이 떠돌고 적은 돈으로도 편하게 대접을 받는 이 ‘음식이 있는 따뜻한 장소’는 공공 공간 중에서 집과 가장 유사하다. 백운호수 주변에는 많은 음식점들이 있는데 그 중 물길이 보이는 위치에 카페가 하나 있다. 2000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3년 전만 해도 퓨전 음식점이었으나, 현재 커피숍으로 바뀌었고, 내년에는 새로운 현대적 양식으로 다시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 카페를 잠시 살펴보자. 진입로에는 소나무가 서 있다. 지붕은 오지그릇을 깨서 만든 기와를 얹고 있으며 그 형상은 초가지붕의 둥근 모양을 흉내 내고 있다. 창문틀은 다듬지 않아 나무의 자연스러운 곡선을 드러내며, 입구의 유리문에는 청사초롱을 든 꼬마 신랑과 신부가 새겨져 있다. 와인 랙이 입구 주변에 있는데 그 위에는 모조 청자항아리에 숯과 함께 담긴 소나무 분재가 놓여 있다. 벽은 흙으로 마감되어 거칠거칠한 질감이 느껴지며, 이층의 천장에는 한지로 만든 연꽃 모양의 램프가 달려 있다. 물길이 보이는 밖에는 여름이면 흰색 파라솔이 펼쳐지고, 주변 밭에는 깻잎이며 상추 등을 심어 객들이 거두어 갈 수 있게 한다. 영국의 골프장에 가서도 고사리를 한 바구니씩 따오고, 도심의 고층 아파트에 살지만 아직도 쑥이며 냉이를 캐러 가는 50대 중반 이후의 여인네들에게 이 장소는 ‘반짝이는 금모래빛’의 고향의 풍정일 것이다. 이곳의 간판은 서구의 방패 모양 상징으로 되어 있으며, 서빙을 하는 직원들은 나비넥타이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영국 집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건물의 사진은 마치 100년 전 조선의 서낭당 나무가 서 있던 초가집을 찍은 엽서의 한 장면인 듯하다.
■두 주인공의 서사; 학의동과 방울재 이런 카페나 식당 주인의 이야기를 잠깐 들어보자. 백운호수에 자리 잡은 한 카페의 주인은 1957년생이며 경기도 토박이다. 그의 조상은 조선시대인 1600년대에 조정으로부터 백운호수 주변 어마어마한 면적의 땅을 하사받았고, 집안은 집성촌을 형성하여 대대로 그 땅에서 살아왔다. 이것저것 하다가 2000년 식당을 하나 냈는데 당시 버섯집의 형상을 선택한 것은 현대적이며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그 모양이 자연환경과 제일 잘 어울리는 듯했고 농촌에서 살아온 자신의 정체를 잘 표현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도시는 미끌미끌하고 차갑다. 내부는 건축업자와 의논해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많이 반영했다고 한다.
■해풍이 부는 부드러운 고향 해방 이후 이 땅을 살아온 우리들 모두의 집은 허칠복과 그 반대편에 위치한 카페 주인의 서사 사이 그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우리들 집의 궤적은 이 땅에 켜를 이루며 쌓여간다. 마치 우리의 모든 삶들이 무의식의 얼룩을 만들 듯이. 두 주인공 모두 어떤 연유에서건 세계의 첫 번째 구석, 자신의 집에서 지속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이렇게 가장 내밀한 삶을 보증할 실체들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우리 모두의 기억은 손상되고 정서는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존 듀이가 말했듯이 구체적 실체가 없는 우리의 경험과 정서는 불완전한 상태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곳은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 불빛이 빛나는 저 도시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누이를 위해, 어머니 역시 말없이 밀수제비를 끓이고 등을 만져주는 그곳(김승옥,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1963), 해풍이 가끔 불어오는 그 부드러운 땅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는 상상 속의 고향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땅도 대부분 럭셔리 전원 주택 부지나 아파트 단지로 확장되면서 고향의 품 대신 전원적 삶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을 위한 땅으로 변신하고 있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2251927165&code=960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