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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블루투스 소통 / 이의용(교양대학) 교수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안타깝게도 비극으로 끝난다. 서로를 연모하던 갑돌이와 갑순이도 ‘안 그런 척’ 하다가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어디 연인만 그런가. 교수자와 학습자가 그렇고, 목회자와 교인이 그렇다. 목사와 장로가 그렇고 상사와 부하가 그렇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는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도 그런 경우가 많다.
 
“차 대기시켜”라는 말을 듣고 차를 끓이다 낭패를 보고, ‘댁으로 갔다’는 걸 ‘대구로 갔다’고 잘못 알아듣고 “미스, 누구죠”라고 묻는 전화에 “미스 아닌데요” 하니 “예, 미스 안”하는 바람에 당황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흥부는 “형수님, 저 흥분데요!”라고 전화했다가 형 놀부한테 뺨을 맞았다고도 한다. 

소통하면 평안이, 불통하면 불안이 온다. 사람이 만든 전자기기끼리는 신기하리만큼 공유가 잘되는데, 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선 ‘블루투스(Bluetooth)’가 작동되지 않을까. 그 대안 몇 가지를 권해본다.

첫째, 평(平) 유리로 소통하라. 사람은 다른 사람과 소통할 때 자기만의 렌즈를 끼고 상대방을 바라본다. 볼록렌즈를 끼면 상대방의 메시지가 실제보다 크게 보이지만 오목렌즈를 끼면 작게 보인다. 줌렌즈를 끼면 상대방의 메시지가 가깝게 또는 멀게 보인다. 빨간색 렌즈를 끼면 상대방의 메시지가 부정적으로 보이고 파란색 렌즈를 끼면 긍정적으로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내부의 감정 상태, 과거의 경험, 선입관, 필요나 목적, 이해관계 등에 따라 자기만의 렌즈를 끼고 소통을 시작한다. 여기에 분위기나 물리적 환경, 맥락, 소음(noise)이 생기면 메시지는 왜곡되고 만다. 뱀은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왜곡했다. 아말렉 사람은 사울 왕이 죽었을 때 자신이 그를 죽였다고 왜곡했고, 종교개혁 당시 성직자들은 성경말씀을 크게 왜곡했다. 국정농단의 주범들도, 비합리적인 정치인들이나 유권자들도 자기 렌즈에 색깔까지 덧칠해 온갖 메시지를 왜곡하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올해 초,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9명은 근거 없이 멋대로 생각하는 ‘인지적 오류’에 빠지는 습관이 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니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이를 믿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퍼 나르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맑고 투명한 평유리 안경을 끼고 정직하고 정확하게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한다. 

둘째, 피드백으로 소통하라. 메시지는 결코 진공상태에서 블루투스처럼 전달되지 않는다. 그러니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은 그 메시지가 정확히 전달됐는지, 또 받은 메시지가 맞는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상점에서 돈을 받은 후 “만원 받았습니다” 하는 것처럼. 피드백은 ‘커뮤니케이션 영수증’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피드백만 제대로 했더라면….

셋째, 직면(直面)으로 소통하라. 당사자와 얼굴을 마주하며 1대1로 소통하는 게 가장 정확하다. 젊은 시절, 갈등관계에 있던 직장동료가 꿈에 자주 나타나 괴롭히는 바람에 힘들어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연히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꿈속의 드라마가 누군가가 전해준 정보, 나만의 추측이나 상상에 기초한 것임을 깨닫고 반성한 적이 있다. 

전임 대통령 기자회견 때, 어느 기자가 평소 장관들과 대면 소통을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장관들을 향해 “그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라며 반문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면서 재벌 회장들과는 왜 직면 소통을 했을까.

아무리 인터넷이나 SNS가 발달해도 대면 소통, 나아가 1대1 직면 소통은 반드시 필요하다. 제3자를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는 습관, 특히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 간에 “∼라고 전해라”는 식의 ‘쓰리쿠션’ 소통은 위험하다. 메시지가 확대·축소·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갑돌이와 갑순이도 직면소통만 했더라면….

소통(코이노니아)은 교회의 동력이다. 그러나 몸집(규모)이 늘어날수록 불통의 공간도 넓어져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쉽다. 특히 목사와 장로, 장로와 장로, 교인과 교인 사이의 소통 부족은 여러 문제의 원인이 된다. 그럴수록 혼자 상상하거나 추측하거나 골방에 들어가 기도만 하지 말고 당사자와 직면 소통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누군가 대화를 하자고 할 때 설레기보다는 떨리지 않는가. 왜? 자기한테 잘못한 구석이 있고 그것이 드러날까 봐서다. 하나님께도 그렇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주님과 직면해보자.

이의용(국민대 교수)
 

원문보기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80816&code=23111413&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