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에서 찾는 고려 1100년의 흔적·2]고려 속 경기, 천년 미래의 답 있다 / 박종기(한국역사학과) 명예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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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 년 전 1018년(현종9) 수도 개경과 주변 12개 군현을 묶어 '경기'라는 특별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
왜 건국 백년이 된 시점에 경기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을까?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된 고려는 12개 군현을 편입시킨 영역의 확장을 통해 수도 개경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자 했다. 1029년(현종20) 개경 외곽을 두르는 나성(羅城)을 축조해 수도 개경의 방어망을 완성했다. 또한 경기지역을 왕실과 조정의 직할지로 삼아 이곳의 조세와 생산물을 핵심 지배층에게 공급해 경제적 안정을 보장했다. 이를 주도한 현종(1009~1031년 재위)은 전쟁을 종식시키고 각종 제도를 정비한 공로로, 중흥(中興)의 군주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경기 설치는 전후 수도 개경의 면모를 일신했을 뿐 아니라 왕조 중흥의 상징성을 갖는다. 또한 경기는 고려전기 정치를 주도한 문벌귀족층을 배출한 곳이다. 안산 출신 김은부(金殷傅)는 두 딸이 현종의 비가 돼 처음으로 왕실의 근친혼 관례를 깨고 왕실의 외척이 됐다. 김은부의 외손인 문종은 인주(인천) 출신 이자연(李子淵)의 세 딸을 왕비로 맞았다. 이자연의 첫째 딸인 인예태후는 순종, 선종, 숙종 세 국왕과 유명한 학승 대각국사 의천을 낳았다. 인주 이씨 일문은 이자겸(李資謙)에 이르는 3대에 걸쳐 일곱 국왕을 배출하는 고려전기 최고의 문벌귀족 가문이 됐다. 인주 이씨로 대표되는 문벌귀족은 불교는 물론 유교, 도교, 풍수지리 등 다양한 사상과 문화의 공존을 허용해 고려문화의 다원성을 확장시켰다. 경기지역은 대장경, 나전칠기는 물론 초기 청자 생산의 중심지였다. 이들 제품은 문벌귀족층의 문화 수요에 따라 생산됐지만 송, 거란, 여진 등 동아시아에서도 호평을 받을만큼 기술 수준이 높았다. 벽란도로 상징되는 경기만 일대의 항구와 바다는 이들 제품을 유통하는 중심지였다. 활발한 교역과 유통으로 고려는 서방세계에 한반도를 호칭하는 '코리아'의 원조가 되었다. 고려왕조의 개방성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사상과 문화의 다원성, 통합성, 정치와 사회의 개방성과 역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고려 다원사회는 이같이 경기지역에서 개화했고 번성했다. 고려왕조를 상징하는 주요 문화유산이 경기도 일대에 집중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지역 출신 문벌귀족층의 후원과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경기지역이 갖는 역사적 위상을 잘 보여주는 예다.
수도권 다음으로 많이 언급된 것이 도농 복합도시, 풍부한 산업(시설) 및 관광 인프라 등 '다양성'이다. 다양성을 통합해 경기도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서울과의 상생과 보완 관계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천 년 전 고려와 맥이 닿아 있는 첨단 융합기술의 중심지로서 체계적인 발전 전략 수립에 경기 천년의 미래가 달려 있다.
출처 : 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80417010006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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