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주말초대석>정성진 국민대총장의 인생역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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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4. 6. - 문화일보 - 장재선 기자/jeijei@munhwa.co.kr 서울대 법대를 나와 사시 2회(1963년)에 합격한 정성진은 동기중 선두주자로 대검 중수과장, 서울지검 특수부장, 대구지검장, 대검특수부장등 검사들이 선호하는 보직을 두루 맡은 특수수사통. PK(부산·경남)를 기반으로 한 김영삼 정권이 TK(대구·경북)출신인 그를 전정권의 비리를 조사하는 대검 중수부장에 임명했을 때만 해도 그의 순탄한 앞길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중수부장 취임 직후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때 부인이 상속받은 재산 등으로 60여억원을 신고했다가 거센 역풍에 휘말려야 했다. 그는 “조직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며 용퇴 결단을 내린 후 미국 스탠퍼드대학 연구원으로 고국을 떠났다. 당시 심정을 그는 ‘퇴수(退修)’라는 조어로 설명했다. 바쁜 공직에서 물러나 심신과 학문을 닦는다는 뜻. “아내와 단둘이 스탠퍼드로 갔어요. 거기서 부부가 사소한 일로 다퉈 아내가 많이 울기도 했지요. 그걸 통해 역설적으로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검찰에서 앞만 보고 걸었다면 제가 그걸 어찌 알았겠습니까.” 그는 공무를 핑계로 아내와 2남1녀의 가족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통렬히 반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막내딸이 “난 어머니처럼 희생의 삶을 살 수 없다”며 검사 사위를 보고 싶어하는 그의 소망을 거절했을 때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미국을 거쳐 일본 게이오대에서 형사법을 연구하며 ‘퇴수’중이던 그에게 지난 95년 당시 박재윤 국민대 법대학장이 교수직을 권해왔다. 검찰 재직시 경북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형사법학회 등에 관계한 경험이 있는 그는 기꺼이 자리를 옮겼다. 국내 유명 로펌의 공동대표직 제의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던 그였다. 법대교수 재직중 개각 때마다 법무장관 물망에 오르내리던 그는 2000년 3월 국민대총장에 임명됐다. “65세 정년퇴임 후엔 법조계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곳이 그리워서가 아니라 제가 법조인으로서 받았던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열어 ‘봉사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