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시론]조중빈 교수/비리 척결이 정쟁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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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5월 13일(월) - 동아일보 - ‘옷 로비’로 시작해서 ‘3홍’으로 마감하는 민주당 정권을 보며 분노를 넘어 이제는 허탈한 마음을 추스를 기력조차 없다. 광복 이후 최초로 정통성을 획득한 ‘문민정부’, 국민의 기대를 온몸에 안은 채 출범한 ‘국민의 정부’가 국민에게 보답한 것은 민간정부도 군사정부 뺨치게 부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장안의 수많은 논객들이 충고에 충고를 거듭해도 마이동풍이고, 이를 보다 못해 그렇게 험한 말로 절규해도 오만하기만 하더니 결국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해 못할 청와대의 호소▼ 얼마 전 청와대는 월드컵과 경제를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라며 정쟁의 중단을 호소했다. 경제도 월드컵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폭로가 이어지는 데 대해 참으로 유감이라는 지적도 곁들였다. 맞는 말이다. 야당으로서도 비리에 대한 공세가 단순히 의혹을 규명하자는 의도 이외에 각종 선거를 앞둔 선거전략적 배려가 담겨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정쟁 중단을 호소한 것은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엄청난 비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손놓고 있다가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비리를 파헤치려는 일을 모두 정쟁이라 규정짓고 중단하자고 호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정쟁 중단과 대사를 앞둔 단합을 진정으로 바란다면 청와대 스스로 비리를 척결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나서야 한다. 의혹의 규명을 위해 필요하다면 특검 조사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야 한다. 비리를 끝까지 파헤치고 시정해야 이를 둘러싼 폭로와 규탄이 멈춰질 수 있고, 누가 다음 정권을 잡든 과거사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정치를 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만연한 부패와 비리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속에서도 한가닥 희망의 빛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밀려서 했거나 숨은 뜻이 있었거나 간에, 정당이 대통령 후보를 경선에 의해 선출했다는 것은 한국정치 발전을 위해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양당 모두 준비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치르기는 했지만 국민과 후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대세론에 안주하던 후보가 이마에 땀을 흘렸으며, 예상 밖의 인물이 두각을 나타내는 성과도 있었다. 앞으로 잘만 제도화되면 대통령 후보 선출에 그치지 않고 국회의원 후보 선출에도 도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되면 국회와 대통령 간의 권력분립이 달성되어 소위 ‘제왕적’ 대통령은 옛 이야기가 될 것이니, 부패와 비리의 소지가 줄어들게 된다는 희망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믿어지지 않으면 미국의 예를 보자. 아마도 외국에서 수입한 민주제도 중 한국인의 생리에 가장 잘 맞는 제도가 경선제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제도가 미국의 권력분립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고 독립된 의견을 가지려면 대통령에게 빚진 게 없어야 한다. 공천과 선거자금을 대통령한테서 받아 국회의원이 되면 국회에 가서 대통령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경선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은 자수성가한 국회의원이 된다는 것이다. 더 이상 대통령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국회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것이다. 이보다 더 소중한 성과는 경선을 통해 사람이 클 수 있는 통로가 열렸다는 점이다. 경선의 묘미는 보통사람도 지도자로 키우는 데 있다. 멀쩡한 사람도 바보 만드는 한국정치 풍토가 이미 큰 타격을 받았으니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의혹 규명에 앞장서야▼ 생산에 가치를 두는 사람과 소비에 가치를 두는 사람 사이의 싸움이 곧 정치이고, 생산을 우선시하면 대체로 보수적이고 소비를 우선시하면 대체로 진보적인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가들이 표를 많이 모으기 위해 자기 색깔을 될 수 있으면 애매하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국민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색깔을 분간해 내야 할 의무가 있다. 부패와 실정 속에서 발전의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는 이 역설을 소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어려운 시국에 여당이 정계개편 운운하는 대신 겸허하게 실정을 고백하고 반성한다면, 그리고 야당은 여당이 실수하기만 바라지 말고 당당하게 제 목소리를 내고 승부를 건다면, 국민이 위로받고 정치에 희망을 갖게 되지 않을까. 조중빈 국민대 교수·정치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