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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소나무를 찾아서>(13)동량삼 찾아 백두대간 답사 `천년궁궐`로/ 전영우(삼림)교수

2003년 5월 30일(금) - 문화일보 -


어명이오 정적에 싸인 산천을 깨우듯 아름드리 소나무 앞에 선 벌목꾼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어명이오’라는 외침이 메아리로 되돌아올 때쯤, 벌목꾼의 도끼날은 소나무의 굵은 밑둥치를 사 정없이 파고들었다. 세 번 되풀이된 외침과 그때마다 내리친 도 끼질로 벌목 의식은 모두 끝났다.
이제는 넘겨야 할 방향을 가늠하면서 큰 기계톱으로 아름드리 소 나무를 베어낼 일만 남았다. 수백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를 베 어내는 일은 산판일에 이골이 난 벌목꾼에게도 마음에 걸리는 일 이었다. 그래서 조촐한 제수를 차려놓고 먼저 산신께 고사를 지 냈다. 그리고 하늘과 같은 나라님의 명령 때문에 아름드리 소나 무를 벨 수밖에 없는 형편임을 ‘어명이오’라는 외침으로 나무에 알렸다. 산신의 가호아래 산천의 정기를 받아 수백년 살아온 나무의 목숨 을 뺏는 일에도 이처럼 절차가 있었다. 물론 벌목꾼이 편치 않는 마음을 스스로 달래는 절차이자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도 했다.

소나무 벌목이 곧 있다는 소식에 만사를 제쳐두고 백두대간을 연 거푸 넘었다. 먼저 대관령을 넘고, 다시 방향을 바꾸어 왕산천을 거슬러 올라 닭목재를 넘었다.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의 산판 현 장에는 신응수 도편수가 기다리고 계셨다.

‘궁궐의 동량재로 쓸 큰 소나무를 베어낼 때는 그에 걸맞은 벌 목 의식을 거행한다’는 도편수의 이야길 들은 지 10년 만에 그 현장을 지켜보는 감회는 새로웠다. 소나무에 궁궐의 재목감으로 서 또 다른 생명을 부여하는 첫 과정은 진지했다. 곧은 나무는 곧은 대로, 굽은 나무는 굽은 대로 제몫을 발휘할 수 있도록 소 나무를 선별하는 과정은 엄숙하기조차 했다. 벌목된 소나무들은 조 심스럽게 다루어졌고, 기둥·보·도리감의 용도에 따라 적당한 크기로 산판에서 잘려진 다음 제재소로 향했다. 건조와 제재, 그 리고 깎고 다듬는 치목(治木)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소나무는 천 년 궁궐의 건축재로 두 번째 생명을 얻게 되고, 그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도편수의 장인정신이 녹아 있음은 물론이다. 도편수와의 인연을 이어준 것은 1993년 여름 대관령 휴양림에서 개최된 소나무 토론회였다. 사흘 동안 솔숲에서 진행된 토론회는 산림학자, 교사, 관료, 농민, 출판인, 화가, 시인, 민속학자, 수필가, 법조인 등이 소나무에 대한 각자의 관심분야를 발표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도편수의 발표 주제는 ‘경복궁 복원과 소나 무’였고, 1991년부터 시작된 경복궁 복원사업의 시의성 덕분에 참석자들의 관심을 끌어 단연 토론회의 백미가 되었다. 도편수는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의 경복궁 복원공사에 건축 재로 소나무만을 사용하는 이유를 이 땅의 나무들 중에 가장 강 하고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으뜸나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덧 붙여 재목으로서 소나무의 높은 가치를 알려주는 흥미로운 일화 도 들려주었다. 그것은 우리 소나무와 백두산 기슭에 자라는 장 백송의 목재강도에 관한 것이었다. 토론회 참가자들은 목재를 다듬 고자 야적해 둔 우리 소나무는 몇 년이 지나도 온전했는데 반해 장백송은 비바람에 쉽게 상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는 도 편수의 경험담을 통해서 우리 소나무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땅의 기후풍토에 수백만년 적응하여 자라온 우리 소나무만의 진면목을 누구보다 생생하게 확인한 이가 바로 도편 수였던 셈이다. 사실이다. 이 땅에 도편수만큼 재목으로서의 소나무를 아는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40여년 동안 도편수가 참여한 숭례문과 불국사와 수원성과 장안문과 창경궁과 경복궁의 보수 ·복원 공사 현장은 소나무 재질에 대한 안목을 길러주는 학습장 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경제발전과 국민의 문화의식 향상에 따라 문화재 의 복원과 보수사업은 급격히 늘어났지만 그에 필요한 좋은 소나 무재의 조달 여건은 점차 악화되었다. 한국전쟁과 그후 사회적 혼란기에 자행된 도·남벌, 솔잎혹파리에 의한 피해확산, 수종갱 신으로 솔숲의 면적이 급격히 줄어든 여건에서 문화재 복원에 필 요한 대경재를 확보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편수가 대목장으로서의 소임 못지않게 좋은 소나무재의 확보에 온 정성을 쏟게 된 이유도 문화재 보수와 복원사업의 관건이 좋 은 건축재의 확보에 있음을 절실히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천년 궁궐을 짓고자 염원하는 도편수에게는 좋은 소나무재의 확 보 역시 숙원이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눈 쌓인 산판을 헤매고 ?╂煐恬?운영하는 이유나 20만평 임야에서 소나무를 키우는 이유 도 오직 우량한 소나무재를 구하기 위한 일념 때문일 것이다. 소나무에 대한 도편수의 믿음은 확고했다. 소나무로 지어진 500 ∼600년 된 옛 건축물을 살펴보면 그 재목은 여전히 생생하고, 그런 상태라면 앞으로도 수백년 동안은 더 지탱할 수 있기 때문 에 이 땅에서 소나무 이상 좋은 재목은 없단다. 그리고 우리도 빈번했던 외침이나 전란만 없었더라면 천수백년 된 목조건축물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란 도편수의 확신은 굽고 약해서 쓸모 없는 나무로 잘못 알려진 우리 소나무를 위해서 최상의 찬사였 다. 재목으로서의 소나무에 대한 도편수의 이런 믿음은 직접 행동으 로 옮겨졌다. 1990년 대통령 관저 신축의 소임을 맡게 되자 인천 항에 이미 야적된 외국산 수입목재를 물리치고, 오직 우리 소나 무만으로 관저를 신축하게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이야기나, 그 책임을 완수코자 태백준령의 소나무재를 헬기로 직접 충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관저 신축이나 조선의 정궁(正宮) 경 복궁 복원에 소나무재만을 고집한 그의 소신은 우리 소나무에 대 한 신뢰와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소나무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정부의 정책에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문화재 관리당국 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소나무재 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만들 어 연차적인 수요량을 예측하게 만들었고, 그를 근거로 산림청은 문화재 복원용 소나무림 육성책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소나무에 대한 도편수의 신뢰 와 관심이 소나무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을 바꾸는데 엄청난 기여를 한 점이다. 경복궁 복원사업을 통해서 소나무가 쓸모 없 는 나무가 아니라 재목으로서도 아주 유용한 나무라는 사실을 국 민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시킨 이는 산림학자나 산림관료가 아닌 바로 도편수였기 때문이다. 도편수의 소나무 사랑에 큰 갈채를 보 낸다.

전영우 국민대 교수(산림자원학) ychun@kookmi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