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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희망이다]29. 음악 속의 나무와 숲 / 김기원(산림자원)교수
[경향신문 2004-12-13 19:03]



음악은 신을 찬미하고 즐겁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대인들이 주문을 외우고 북을 치고 장단을 맞춰가며 노래한 것에서부터 음악이 형성된 것이다. 그들이 찬미하고 숭배한 신은 나무와 숲을 지배하는 신이었다. 말하자면 나무와 숲을 찬양하는 일에서부터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라틴어에서 음악의 어원에 해당하는 영어는 뮤즈(muse)인데 뮤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의 딸로서 시, 음악, 무용 등을 주관하는 아홉 여신이다. 전국에서 모인 신들이 제우스 신전에 모여 연회를 열었다. 연회 때마다 음악이 연주되고 시와 노래로 신들을 위로하였는데 뮤즈의 합창 지도자인 아폴론이 리라를 타면서 연회장에 모인 신들을 즐겁게 하면 뮤즈가 노래를 불러 흥을 돋우었다. 그런데 뮤즈가 살았던 곳은 다름아닌 헬리콘 산과 파르낫소 산의 숲이었다. 음악의 신들은 이처럼 숲에 머물면서 숲의 정기를 품고 목소리를 다듬으며 살았던 것이다.


나무와 숲은 음악의 형성에 있어 소재, 주제, 배경이 될 뿐 아니라, 악상의 샘터로서도 영향을 주고 있다. 음악예술의 형성과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소리인데 소리로서 음은 도구인 악기가 없으면 가치를 잃는다. 그런데 소리와 악기의 시초는 자연이며 숲에서 출발하고 있다. 숲 속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여러 종류의 새 울음소리, 개울물소리, 바람소리 등 무궁무진한 음향적 재료가 숨쉬고 있다. 음악작품에 이러한 자연의 소리를 도입한 음악을 표제음악이라고 하는데 바로크 시대의 비발디에서부터 고전 시대의 헨델과 하이든, 베토벤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곡가들이 표제음악을 작곡하였다.


나무는 악기를 만드는 재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모차르트가 ‘악기 중의 악기, 악기의 황제’라고 감탄한 파이프 오르간은 금속 파이프를 제외하고는 거의 목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때때로 목재로만 제작된 것도 있다. 악기의 여왕이라 불리는 바이올린도 현과 활털을 제외한 나머지 부품은 모두 나무로 되어 있다. 부품들은 한 종류의 나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거의 대부분 다른 종류의 나무를 사용한다. 각각의 세부구조들은 악기가 받아야 하는 장력과 압력을 잘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다.


아마티-스트라디바리-과르네리로 이어지는 인맥은 바이올린의 명제작자들이다. 이들이 만든 악기는 명기로 알려져 있고 대단히 귀해서 수천~수억원 또는 부르는 것이 값으로 되어 있다. 나무는 악기의 가치를 결정하고 명기로서의 전통을 이어가게 한다. 울창한 숲 속에서 자란 나무가 없다면 숭고한 소리와 세밀한 음색을 낼 수 있는 오르간이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들이 만들어질 수 없을 것이고 훌륭한 작품을 연주할 수 없을 것이다. 깊고 깊은 숲 속에서 백년, 수백년을 자란 질 좋은 나무로 제작된 악기가 천년의 소리를 재현할 수 있고 대작곡가의 잠자는 영혼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작곡가는 일상에서 얻은 악상을 작곡이라는 창작적 노동을 통해 음악예술로 승화시킨다. 자연과 숲에서 얻은 악상으로 불후의 명곡을 작곡한 예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베토벤이 전원도시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요양생활을 하는 동안 거의 매일 찾았던 빈 숲은 그의 삶과 창작활동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808년에 완성된 교향곡 제6번 ‘전원’이야말로 숲이 불멸의 작곡가 베토벤을 통해 예술로 승화된 결정체다. ‘전원’을 쓸 때 귓병이 너무 심해서 단 한 마디도 기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럴 때마다 숲에서 안정을 찾곤 하였다. 그러한 육체적인 고통을 이겨내고 완성한 작품이 바로 교향곡 ‘전원’이다. 전원 교향곡에서처럼 작가와 숲이 한몸이 되어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예도 찾기 힘들 것이다.


슈베르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을 연결한 작곡가다. 그의 가곡에서 인간 삶의 다양성뿐 아니라, 인간 삶에 결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연의 여러 현상을 맛볼 수 있다. 황량하고 쓸쓸한 겨울 풍경의 적막함과 고독감을 ‘겨울 나그네’에서처럼 그렇게 통절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작품은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이 작곡될 때에는 오랜 기간 계속된 수치스러운 병마와 더욱 어려워진 가난에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나 장을 끊을 듯한 비통함과 의지할 곳 없는 절망감을 그는 한 그루의 나무, 성문앞 우물가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보리수로부터 위로와 안식을 받으려 하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에 천근만근 삶의 무게를 벗어놓고 위로받으려 하는 한 예술가와 시인의 마음을 읽을 때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1866년 6월이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 프로이센과 벌인 전쟁에서 패하자 빈 거리는 상이군인과 남편, 아이 잃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국민들은 사기를 잃어 나라는 우울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이럴 때 침체된 마음을 심기일전하게 만든 작품이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 빈숲 속의 이야기’다. 12분여 동안 흐르는 선율 속에서 현과 관과 북은 빈 숲 속에 깃든 이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예술과 민족의 삶 모든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가슴에 품고 있는 민족혼을 불러내 응어리진 전쟁패배의 마음을 위로하고 사랑으로 묶어 다시 하나가 되게 한 위대한 예술의 힘이었다. 그 배경에 숲이 있었다.


황병기 선생은 평생을 국악에 몸바쳐온 한국 음악의 산 증인이다. 1962년에 탄생한 첫 창작곡 ‘숲’은 가야금 독주곡으로 숲의 세계에서 녹음, 뻐꾸기, 비, 달빛이 펼치는 풍경을 읊은 것이다. 녹음이 우거진 은성(殷盛)한 숲은 그윽하고 시원한 느낌을 받으며 속세의 어지럽고 복잡함이 없는 여유로운 곳으로서 이러한 분위기를 가야금이 여음의 묘미를 맛볼 수 있는 선율로 이끌고 있다.


물소리·바람소리·잎 갉아 먹는 곤충의 저작소리·새울음소리·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열매 떨어지는 소리로 벅신거리는 숲에 서면 자연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곳에 와 있는 듯하다. 나무 또한 아름다운 선율을 들려주는 악기를 만드는 원자재이며, 줄기에 귀 기울이고 들어보면 그 스스로도 소리를 내는 발성체임을 알게 한다. 숲의 고요함 속에서 눈을 감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천차만별의 이런 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연의 교향곡을 듣는 듯한 기분이다. 변화무쌍하고 아름답게 변하는 숲이라는 무대에 서서 생명체이건 무생물이건 온갖 종류의 것들이 저마다의 톤으로 조율하며 연주하는 듯하지 않은가. 나무는 악기, 숲은 콘서트홀이다.


〈김기원/국민대학교 교수〉

〈공동기획 : 산림청·산림조합중앙회·숲과 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