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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찮은 사물의 변신 일상서 건진 특별함 [김한들의 그림 아로새기기] / 김한들(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9) 최정화가 추구하는 일상의 예술 / 한국 포스트모던 아트 1세대 / 미술계 주류 떠나 예술 매진 결심 / 설치미술 넘어 인테리어·건축까지 / 무대 디자인하고 영화 미술감독도 / 독특한 형태·어법으로 유혹 / 거대 설치미술 작품 ‘숨쉬는 꽃’ 각광 / 현대미술관에 2018년 ‘민들레’ 설치 / 가정서 버려진 생활용품으로 만들어 / 고급예술·대중문화 담 허물기 / 작품 앞으로 사람들 모으는 것 중요 / 공동체·예술의 마음 잇는 작업 매진 / 보편성 담아내 국제 무대서도 주목

# 일상, 눈이 부시게 하찮은

마스크를 한 달째 벗지 못하는 지금, 가장 절실히 깨닫는 것은 일상의 소중함이다. 무엇도 걸치지 않은 얼굴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 개천을 천천히 산책하는 것. 그러다 쉬고 싶어지면 눈에 들어오는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차 한잔에 몸을 녹이는 것.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던 매일의 활동이 이렇게 그리워진 것은 처음 겪는 일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우리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그것을 위해 거대하고 특별한 일들조차 버텨내며 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상’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자 최정화(1961~)의 작품이 생각났다. 그는 한국 포스트모던 아트 1세대로 불리는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작가다. 멀리서 관망하면 화려하게 느껴지지만 가까이서 살피면 일상의 소박한 재료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우리의 발 밑, 옆, 아래 있는 것들을 ‘눈이 부시게 하찮은’ 것이라고 표현하며 귀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그의 작품은 전시장을 벗어난 삶의 터전 곳곳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최정화의 인물 사진. P21 제공

# 최정화의 예술,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오가거나 흐트러트리거나

최정화는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당대 가장 큰 공모전이었던 중앙미술대전에서 두 해 연속 수상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흔히 말하는 미술 엘리트 코스였지만 그는 그 길만 따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상을 받고 감흥을 느끼지 못하며 미술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마침 이 시기에 두 개의 망가진 의자가 하나로 합쳐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나는 몸통이 없고, 다른 하나는 다리가 없었는데 그 둘을 잘 맞춰 줄로 감으니 완벽한 의자가 되었다. 이런 것이 예술일 수 있다고 생각했고 미술 아닌 예술을 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추상미술과 민중미술 작가들로 이루어진 미술계의 이분법적 구조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대신 가슴시각개발연구소를 만들어 가슴을 깨우는 통찰력이 보이는 시각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설치미술은 물론 인테리어나 건축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작업을 펼치게 된 이유다. 그는 자신을 작가가 아니라 AAA라고 소개한다. Always Almost Artist(언제나 거의 예술가)라는 뜻이다. 인사동의 쌈지길, 서울문화재단부터 종로의 오존 등 바까지 인테리어를 맡았다. 현대 무용가 안은미의 무대를 디자인했고 ‘복수는 나의 것’ 등 영화 미술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최정화의 작업세계는 이렇게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오가거나 혹은 흐트러뜨린다. 부엌에서 사용하는 플라스틱 소쿠리를 수백개씩 쌓아 올려 작품을 만든다. 그리고 그 독자적 형태와 어법으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의 작품에 관한 호불호가 나뉘더라도 따분하다고 말한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이렇게 눈을 잡은 작품은 하찮은 사물들의 변신을 보여주며 예술의 정체에 관해 묻는다. 동시에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며 보편성을 담아내기에 국제무대에서도 주목받는다.


▲‘숨쉬는 꽃’(2018)의 프랑스 안시 시청 설치 장면. 풍선으로 만든 화려한 설치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P21 제공

‘숨쉬는 꽃’의 경우 이탈리아 베니스비엔날레(2005), 호주 시드니비엔날레(2010), 미국 샌프란시스코 시청, 홍콩 모바일 M+(2013), 프랑스 안시 시청(2018) 등에서 선보인 바 있다. 국내에서는 2015년 한강 세빛섬 일대에 각각 12m, 8m, 4m에 이르는 거대 설치로 시민들을 만났다. 풍선 구조의 핫핑크 꽃잎이 공기에 의해 숨을 쉬며 움직이는 작품이다. 작품 앞에 서면 자연과 인공의 조화, 재생과 순환, 그리고 생과 사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 대형 설치로 우리에게 나타난 현대판 민화, ‘민(民)들(土)레(來)’

최정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2018년에 다시 한번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MMCA 현대차 시리즈 2018: 최정화 - 꽃, 숲’에서 선보인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전시에서 미술관 마당에 ‘민(民)들(土)레(來)’(2018)를 설치했다. 작품은 대중의 호응을 얻어 연장 전시됐고 미술전문지 프리즈(Frieze)에도 실렸다.

담벼락 없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마당은 도로를 향해 열려있다. 파릇파릇한 잔디 위에는 민들레 모양을 한 거대 설치물이 서 있다. 멀리 지나가던 사람까지도 그 앞에 와서 서게 만드는 형형색색의 매력 있는 모양새다. 앞에 서면 마주하는 작품은 값비싼 재료가 아니라 플라스틱 대야, 찌그러진 냄비, 까맣게 그을린 주전자임을 알게 된다. 그것들을 기다랗게 엮어 방사형으로 합쳐낸 결과물이다.

▲‘민들레’(2018)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설치 장면. 이 방사형의 설치물은 민들레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다. 주전자, 바구니 등 일상 속 물건을 모아 만들었다. P21 제공

‘민들레’는 그해 3월부터 진행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 ‘모으자 모으자’의 일환이다. 최정화는 군산 산업단지에서 영종도까지 오가며 가정에서 버려진 생활용품을 수집했다. 이렇게 모은 식기 7000여 개는 높이 9m 무게 3.8t에 이르는 설치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낡아 빛을 잃은 것이 민들레의 꽃말처럼 행복과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작품은 민화와 다를 바 없다.

애초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일상과 예술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목적으로 건축했다. 해외 유수 미술관이 가진 거대하고 웅장한 외관 대신 나즈막한 건물로 주변과의 조화를 강조한 이유다. 이 미술관의 가장 큰 특징은 담벼락이 없는 것이다. 곳곳에 자리 잡은 마당에 누구나 들어와 여유를 느낄 수 있다. 민들레는 이 마당에서 선보인 작품 중 장소의 존재 이유와 가장 잘 통해 더욱 높이 평가받았다.

최정화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버린 물건과 다시 태어나는 물건의 순환에 대한 이야기.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이야기’. 그리고 작품 앞에 시를 지어 비석을 만들었다. ‘텅 빈 내가 먹던 그릇, 너를 먹이던 그릇, 네게 힘을 내주어 주고 남과 더불어 살라는 밥 그릇 땅과 하늘 사이 찬란한 빛이 되었습니다 먹이고 먹는 일을 돌보시는 어머니 당신께 이 빛을 바칩니다.’

# 최정화가 보여주는 일상 속 예술과 공동체의 마음

최정화의 작품은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 그의 공공 미술 프로젝트는 광장, 백화점, 공원에 거대한 과일나무와 꽃나무로 피어있다. ‘일상’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최정화를 떠올린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다. 하루에 두어 번을 오가는 아파트 단지 안에도 최정화의 과일나무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사람들은 항상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 앞을 지난다. 단지에 사는 아이들의 대표적인 약속 장소로도 인기가 꽤 높은 편이다.

최정화의 작품은 이렇게 공동체와 예술의 마음이 모이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작품 앞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연결하여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일나무 앞에서 모여 자전거를 타거나 줄넘기하던 아이들 모습을 본 지 오래다. 인간은 자구책을 찾고자 하는 본성이 있으니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그것의 과정이 순조로웠으면 좋겠고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지 않기를 바란다. 항상 마음의 위로가 되던 고요가 마음의 불안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하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는 적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학교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원문보기:http://www.segye.com/newsView/20200311520927?OutUrl=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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