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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속의 국민
성과보고서조차 요구하지 않는 네덜란드의 예술 지원 / 김재준(국제통상학과) 교수

 

 

 “어느 누구도 그날 그 음악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잠시 자유로워졌다는 것만은 분명했습니다.”(영화 ‘쇼생크 탈출’ 중에서)



감옥에 울려 퍼진 오페라 아리아.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팀 로빈스 분)이 ‘피가로의 결혼’ 아리아를 틀었더니 그렇게 험하고 무시무시한 죄수들도 그 아름다움에 취해 정신을 잃고 듣는 장면. 예술과 제일 멀리 떨어진 환경에 처한 사람들도 최고의 고급 예술을 접하는 게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생애 단 한 번의 예술 경험일지 모른다. 이처럼 예술은 단순한 취미나 취향을 넘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흔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국가가 예술에 투자해야 하는 이유도 단순한 문화 진흥이나 산업 발전이 아닌, 바로 ‘인간 회복의 힘’에 있다. 이 힘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최후 보루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의 예술 지원 정책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예술 본질을 의심하는 듯한 구조가 눈에 띈다.

 

예술은 누구의 것인가


한국의 문화예술 지원은 여전히 ‘성과 중심’이다. 멋진 기획안, 정교한 정산서, 인상적인 실적이 심사 기준이 된다. 그러다 보니 “글 잘 쓰고 인맥 있는 사람만 지원을 받는다”는 불신이 생긴다. 심사위원조차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가 선정돼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성공 가능성은 출발부터 불가능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주말 내내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해봤습니다. 결국 정책 방향과 간사의 심사위원 선정 방식이 근본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라고 털어놓을 정도다. 심사 결과를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해 심사위원 판단에 대한 사후관리가 이뤄져야 한다.



다시 심사위원의 말. “문화예술과 디자인 관련 문제는 객관적인 설명이 어렵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늘 문제가 지적되지만 인정하지도 않고, 개선되지도 않습니다. 뭔가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해 저도 아쉽습니다. 지원 금액 문제도 조사해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으리라 예상됩니다. 객관적 평가가 어려우니 적은 금액을 다수에게 나눠 줘 사방에서 나오는 불만을 줄이다가, 어느 순간 지원 금액이 적어 실질적인 효과가 없다는 새로운 불만이 증폭되면 건당 지원 금액을 대폭 늘립니다. 그럼 지원의 객관성이 문제가 되고, 다시 적은 금액을 다수에게 나눠 주는 정책을 무한 반복하는 것이 이 분야의 속성입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슬픈 현실은 이러하다.



반면 네덜란드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고 볼 수 있다. 몬드리안펀드(Mondriaan Fund)는 네덜란드 교육·문화·과학부(Ministry of Education, Culture and Science) 예산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금이다. 매년 약 4100만 유로(약 656억5400만 원)를 투자해 시각예술 및 문화유산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과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주목할 점은 절대 결과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과보고서조차 없다. 그 대신 지원 당시 예술가가 추구하는 실험성, 사회적 가치, 창작 과정 자체를 심도 있게 평가한다. 예술은 과정이며, 실패도 예술의 일부다. 이 철학이 정책의 중심이다.



몬드리안펀드는 예술을 공공재로 본다. 여성 예술가가 육아로 창작이 어려우면 아이 돌봄 비용을 지원한다. 진정한 출산율 제고 정책 아닌가. 신진 작가, 디자이너, 전시 기획자까지 모두 포함된다. 목표는 단 하나, 예술가가 예술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대사처럼 “살민 살아진다”가 돼서는 곤란하다. 이 철학은 이상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몬드리안펀드는 유럽 내 공공예산 집행 신뢰도 1위다.



한국의 예술 지원은 일부 성공 사례도 있지만 실패 사례가 더 많다.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모델은 빈민층 아동들에게 예술교육을 제공해 세계적 예술가를 배출했다. 이것을 모방하려 했지만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감동보다 실적, 예술 감수성보다 악기 개수와 공연 횟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예술을 산업의 한 축이나 복지정책의 도구로만 여긴다. 네덜란드처럼 예술을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보지 않는다.

 

 

문화강국 한국은 가능하다


이제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세금으로 예술가를 도와야 하나”가 아니라, “왜 모든 시민은 예술을 누릴 권리를 갖지 못하는가”로. 예술은 고립된 전시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역으로, 일상으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살아 있는 예술이 된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문화 DNA를 지닌 나라 중 하나다. K-드라마, K팝, K-푸드, K-민주주의는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시민들은 그 예술의 혜택을 일상에서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 예술가는 생계를 걱정하고, 지방은 늘 서울에 밀린다. 해결책은 복잡하지 않다. 성과보다 사람을 믿는 정책, 실패도 포용하는 시스템, 행정보다 철학이 앞서는 구조. 이것이 ‘예술국가’의 출발점이다. 그 시작은 지금,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