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서]'메르스 징비록'이 필요하다 / 이은형(경영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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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재앙을 겪거나 실패를 경험했을 때 최선의 대응책은 '징비(懲毖)'다. 징비란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로 "그것을 징계해서 훗날 환난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에서 따왔다. 즉 재앙이나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여 대비함으로써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서애 유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은 그런 면에서 가장 치열하고 모범적인 참회록 겸 분석 보고서라 할 수 있다. 명지대학교 한명기 교수는 최근 "유성룡은 죽음으로도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없다며 철저하게 잘못을 인정함과 동시에 왜군에 대해서는 적개심을 뛰어넘어 객관적인 분석을 통해 후일의 대비책을 찾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징비록의 진가는 임진왜란 7년 동안 수행했던 전투 중에서 패배한 전투에 더 많은 분석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 있다. 100년 동안의 내전을 통해 고도로 훈련된 경험 많은 병사들, 조총으로 무장한 가공할 화력, 지휘관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군기 등을 왜군의 강점으로 꼽으면서 동시에 조선군사들의 허약한 실상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기술했다. 물론 유성룡은 단지 문제를 분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화기와 병법을 도입하고, 직업군인제를 창설했으며, 무역이나 통상을 통해 경제를 활성화하려고 애썼다. 왜군 포로를 포섭해 조총 제조법을 익혔고, 명나라에서 신형 대포나 독화살 제조법도 배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이나 명나라로부터 화기 제조법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화력을 증강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징비의 정신을 이어받지 못한 이유는 정쟁과 사리사욕 때문에 공과 과를 엄격하게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병장으로 경상도 일대를 지켜내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곽재우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데 그쳤다. 서애는 임진왜란이 끝남과 동시에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사망한 이후 시호조차 받지 못한 채 철저히 외면을 당했다. 선조를 따라 의주로 피신했던 일행에게 대거 '성호공신'이라는 이름으로 치하한 반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를 누빈 '공신'에 대해서는 공을 깎아내리거나 외면한 것이다. 공이 높고 백성의 칭송을 받을수록 선조의 미움을 받는 형국이었다. 이 때문에 훗날 병자호란 등의 환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의병이 일어나 나라를 지키는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고 한명기 교수는 설명했다.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징비록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데 반해 일본에서는 철저히 연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까지 인기를 얻으며 널리 읽혔다는 점이다. 세월호 트라우마가 가시기도 전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으로 인한 혼란이 또다시 국민생활과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메르스 사태가 진정되면 '징비록'이 작성되어야 할 것이며, 그에 따른 후속조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먼저 당국의 솔직한 반성과 함께 당파나 사리사욕에 휘둘리지 않는 객관적이며 엄중한 분석과 대비책이 나와야 할 것이다. 또 처벌과 평가가 명확하게 이루어져 같은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원문보기 : http://view.asiae.co.kr/news/view.htm?idxno=20150623110808075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