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인사이트] 中 과학 역량 폭발적 성장 … ‘소프트 혁신’이 유일한 대응책 / 은종학(국제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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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 이후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그렇다면 인공지능 연구의 강국은 어디일까. 세계적인 학술정보 데이터베이스인 웹 오브 사이언스(Web of Science)에 따르면 이 분야 논문을 가장 많이 낸 나라는 미국도 영국도 아닌 중국이었다. 중국은 4050건(전체의 31.2%)으로 미국(15.4%)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한국 비중은 2.9%으로 15위에 그쳤다. 중국은 과학 연구 분야에서도 우리를 압도한다는 얘기다. 중국 경제가 불안하다. 올해 6.5% 이상 성장하겠다는 목표도 녹록지 않아 보인다. 일각에서는 ‘중국 경제 위기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다. 많은 중국 기업에서 내부 역량(capabilities)이 강화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거시적 둔화와 미시적 강화 항공기 제조 분야를 보자. 중국이 독자적으로 상업용 비행기를 만들겠다고 나선 건 2006년이었다. 보잉·에어버스 등 세계 메이저 업체들은 ‘그 복잡한 기술을 중국이 어찌…’라고 코웃음 쳤다. “기껏해야 ‘짝퉁’ 비행기 만들다 말겠지”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그러나 중국이 개발한 민간항공기 C919는 지금 상하이 푸둥(浦東)의 중궈상페이(中國商飛) 공장에서 조립 작업을 끝내고, 시험 비행 단계로 접어들었다. 고속철도도 그랬다. 2000년대 중반 독자 개발에 나섰을 때만 해도 업계 전문가들은 ‘시기상조’라고 입을 모았다. 독일 지멘스, 프랑스 알톰스, 일본의 가와사키 등은 핵심 기술을 감추며 중국 기업들을 농락했다. 그러나 중국은 지금 전 세계 고속철도의 절반이 넘는 약 1만6000㎞의 노선을 깐 이 분야 최고 기술 강국이 됐다. 우주개발 분야에서는 이미 달 탐사선을 보내기도 했다. 인터넷 모바일 분야도 주목할 만하다. 젊은이들 사이에 불고 있는 창업 붐은 실리콘밸리를 능가할 기세다. 정부는 ‘대중창업, 만중창신(大衆創業 萬衆創新)’이라는 슬로건으로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그에 호응한다. 거시 경제의 둔화 속에서도 미시적으로 들어가 보면 기업의 혁신 역량은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학의 힘이다. 37만7000여 개에 이르는 ‘규모 이상의 기업(매출 약 35억6000만원 이상의 기업)’들은 수익률 하락 속에서도 2013~2015년 연구개발(R&D) 인력을 40% 이상 늘렸다. R&D에 쏟아부은 예산도 같은 기간 50% 이상 증가했다. 이러한 증가가 외자기업에 의해 이루어진것은 아닐까. 장비 구입에 큰돈이 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들 만도 하지만 아니다. 기업 형태별로는 사영기업이 외자기업·국유기업보다 활발하게 R&D에 투자했다. 투자 대상으로는 장비·설비 구입(33.9% 증가)보다는 연구 인력에게 지급되는 급여(77.0% 증가)에 집중됐다. 대규모 R&D 인력을 투입해 다수의 신제품을 동시다발적으로 개발하는 ‘인해전술’ 방식이다. 중국 내 형성된 방대한 이공계 인재풀이 있기에 가능한 얘기다. 중국 기업들의 R&D 수준은 인프라를 갖춰 가는 초기 단계를 벗어나 혁신 역량을 상업화하고, 더 심화하는 경지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R&D 증대가 기업 역량 강화의 전부는 아니다. 기업가정신, 조직의 규율과 효율성, 시장의 변화에 대한 적응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최근의 R&D 동향은 ‘중국이 낮은 생산원가로 모방품을 만들거나 해외에서 개발된 제품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하는 단계에 벗어나 자주창신(自主創新·독자적인 혁신)의 단계로 진입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미국과 견줄 중국의 과학 역량 과학적 성과의 상업화 여건은 어느 나라보다 뛰어나다. 중국에는 아이디어만 가져오면 시제품을 뚝딱 만들어줄 수 있는 두터운 제조 기반이 있다. 전국에 퍼진 ‘산자이(山寨·짝퉁 제조업체)’들이 창업 아이디어맨들과 연합하고 있다. 다국적기업에서 경험을 쌓은 젊은이들은 거부를 꿈꾸며 창업대열에 뛰어든다. 소비자들은 전통적인 소비 패턴에 고착되지 않고 새로운 스타일의 소비 생활을 즐긴다. 세계 시장점유율 1위 상품 수가 가장 많고, 또 가장 빨리 늘어나고 있다는 게 이를 증명한다. 세계 1등 상품 수는 2009년 1239개에서 2014년에는 1610개로 늘었다. 중국은 과학 연구의 전 분야에서 약진하고 있다. 웹 오브 사이언스에 등재된 국제 과학논문(2015년 총 146만 편)의 저자들을 국가별로 분류해 보면 중국은 2002년 전체 논문의 4.5%에 그쳤지만 2015년엔 18.7%로 늘었다.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과학 대국이다. 같은 기간 미국이 33.0%에서 26.1%로 줄어든 것과 대비된다. 수학 분야에서는 2위인 중국(18.8%)이 미국(20.0%)을 바짝 추격하는 양상이다. 3위인 독일(6.9%)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선두권을 달리고 있다. 반면 한국은 세계 비중 2.7%로 이란에 이어 14위에 그친다. ‘과학으로 중국의 추격을 따돌린다’는 우리나라 학계의 일부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처럼 들린다. 한국의 선택은 ‘중국이 아직 하지 않고 있는 영역을 우리가 선점해야 한다’는 생각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의 과학 연구는 중국과 매우 유사하다. 특화 분야가 중국과 겹치고, 양·질적으로 뒤지고 있는 셈이다. 과학을 통해 중국을 따돌리거나 과학을 통해 중국과 차별화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거시적 둔화와 미시적 강화’는 모두 한국에 묵직한 도전을 제기한다. 중국 거시 경제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에서 먹을 떡이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기업의 강화는 더 심각한 문제다. 내부 역량을 강화한 중국 기업들이 한국 기업들을 강하게 위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대기업의 주된 영역이었던 철강·화학·기계·선박·디스플레이·반도체 등 장비산업 분야에서 중국은 이미 상당한 실력을 키웠다. 자칫 한국 기업들이 중국 산업에 빨려들 수도 있다.
경쟁 아닌 협력·네트워킹으로 자본재 제품의 경쟁력은 기능과 효율이 결정한다. 과시적 소비, 개성, 유행 등이 함께 작동하는 소비재 산업과는 다르다. 그만큼 기업의 연구개발과 과학기술 역량 강화가 중요하다. 중국과 중첩되는 영역에서의 경쟁은 피할 수 없다. 우리 역시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미시 수준의 기업 역량 강화에 나서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 강함이 아니라 유연함을, 경쟁이 아닌 협력과 네트워킹을 추구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싱가포르는 참조할 만한 가치가 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2014년 구매력 평가 기준 8만3000달러)으로 세계 3위인 싱가포르는 국가 창립 이래 ‘아시아의 제1세계’라는 국가 이미지 구축을 위해 중국보다는 서구와의 교류 협력에 주력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국과의 과학 연구 및 산업화 협력을 위한 채널 구축에 매우 적극적이다. 싱가포르국립대, 남양이공대, 싱가포르경영대 등 3대 국립대학에 이어 싱가포르기술디자인대학(SUTD)을 제4의 국립대학으로 설립해 디자인을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고 있다. 한국은 ‘소프트 이노베이션(soft innovation)’의 길을 더 넓게 열어야 한다. 디자인, 패션, 엔터테인먼트 등의 창의(創意)산업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소비재와 서비스 분야에서의 대중국 비교우위를 지킬 수 있다. 은종학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원문보기 : http://news.joins.com/article/19912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