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1)식기‘그릇의 기술’서 ‘식탁 문화’로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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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와 문양에 식문화 속살 오롯이 디자인 비평가 조현신 교수(국민대 테크노디자인 전문대학원)가 집필하는 기획 시리즈 ‘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을 시작한다. 디자인은 한 사회가 지닌 욕망과 환상, 미적 감각과 이데올로기 등이 오롯이 녹아든 집약체다. 100여년 전 개항기부터 우리와 함께 한 토종 기업들의 주요 일상생활 제품 디자인 분석을 통해 한국인의 삶과 가치관, 시대상의 변화 등을 의미있고도 흥미롭게 읽어낼 계획이다.
■ 조현신 국민대 교수는 한국인은 도자기에 유별난 사랑을 보인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는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자랑거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선시대 왕실과 관에 그릇을 납품하던 300여개의 관요가 1882년 왕실 직속의 광주분요를 마지막으로 폐지되면서 전통 도자기는 일정 부분 더 발전하지 못한다. 기술을 발전시킬 기반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인의 밥상에는 유기·목기·옹기 등이 쓰였고, 일본 ‘왜사기’가 확산됐지만 잘 만들어진 사기그릇은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상류층용으로 서구의 수입 도자기가 들어왔고, 서민들의 밥상에는 값싼 양은 식기가 올랐다. 1970년대 스테인리스 그릇이 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요식업체가 스테인리스 그릇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영업정지 등을 받기도 했다. 이 와중에 멜라민과 법랑 등이 선보였고, 1990년대 초반 보온밥솥 유행으로 도자기 그릇이 확산돼 오늘날 도자기 식기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국의 식기류 산업과 제품 생산은 토종 장수기업으로 불리는 행남자기부터 시작됐다. 고 김창훈 회장이 1942년 목포에서 ‘행남사’를 창업, 1970년대까지는 수출 위주로 만들고, 1980년대 이후 내수를 시작하며 식기류 산업을 주도했다.
회사명 ‘행남’에서 ‘행’은 ‘살구나무(杏)’로 행남은 남쪽에서 잘 자라는 살구나무를 뜻한다. 심벌 마크는 5개의 화판에 7개의 술을 달고 있는 살구꽃이 그릇 위에 받쳐진 형상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모양새는 일제강점기에 보편적으로 쓰이던 기하학적 심벌 디자인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 들어 사명은‘행남자기’로, 심벌은 금빛의 영문 이니셜 H로 바뀐다. 수출이 강조되던 1970년대 살구꽃 문양으로 ‘Made in Korea’를 달고 해외로 나가다 수출 퇴조, 국내 시장 확대 시점에 심벌이 오히려 영어로 바뀐 것이다. 식기 세트의 이름 변천은 한국인들의 친서구적으로의 취향 변화를 잘 보여준다. 1970년대 ‘백조’ ‘늘봄’ ‘풍차’ ‘가송’ ‘가화’ ‘은파’ 등의 명칭이 1980년대 중반에는 ‘킹’ ‘부루’ ‘솔로몬’ ‘보스톤’ 등으로 변했다. 1990년대에는 ‘뺑띠미어’ ‘루블레르’ ‘베어나도’ 등 프랑스어도 등장한다. 이러한 심벌이나 브랜드명의 변화는 서구, 특히 유서 깊은 유럽 것들에 대한 ‘묻지마식’ 선호가 작용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실 이 같은 취향의 쏠림 현상은 식민지배를 당한 국가들에서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이기도 하다. ■ 크기도 갈수록 줄고 무늬도 점차 서구화 식기 크기에서는 밥의 양이 줄어드는 한국인의 식문화 변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밥공기의 경우 1940~1960년대에는 500㏄ 이상의 크기였으나, 이후 계속 줄어들어 1970년대는 450㏄, 2013년에는 260㏄로 크게 작아진다. 밥 소비량이 줄어드는 대신 빵, 고기 등의 소비가 많이 늘어나고 있음을 식기 크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실제 한국인의 현재 하루 쌀 소비량은 1인당 184g이다. 밥 한 공기를 100g으로 볼 때 한 사람이 하루 두 공기도 채 먹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밥의 양이 줄어든 사이 고기 소비량은 1950년대에 비해 6배 늘어나고, 외식산업과 일회용 식품 시장도 대규모로 확장됐다.
그릇에 새겨진 무늬에서는 한국인의 정서 변화를 읽을 수 있다. 1940년대 그릇에는 복을 빌고 건강과 장수를 염원하며 ‘壽(수)’ ‘福(복)’ 자를 길상문양과 함께 단순하게 새겨 넣었다. 일상적 기원이 담긴 민화처럼, 일종의 기복적 디자인이다. 1950년대에는 작고 소박한 꽃들이 배치되고, 한식 특유의 국물을 담기 위해 주로 오목한 형태를 띠었다. 하지만 서양 음식이 보편화되면서 평평한 서양식 접시가 등장하고, 금박의 단순한 기하학 무늬, 짙고 큰 꽃들이 새겨진다. 이는 우리 공간의 조경화 변천과도 일치한다. 1970년대 주택 담벼락 밑에서 피어나던 봉숭아, 분꽃, 과꽃 등은 아파트와 서양식 조경에 밀려났고, 가로나 정원이 서양 꽃으로 장식되는 흐름이 식기류 무늬에서도 그대로 엿보이는 것이다.
한국 최초의 커피잔 세트(1953년)도 언급할 만하다. 특히 ‘홍장미 셋트’는 큰 인기를 누렸다. 영화감독 김태용과 결혼한 탕웨이 주연의 영화 <색계>에도 장미문양 세트 식기가 등장한다. 노회한 부일 장교를 유혹하는 덫의 하나인데, 금박 테두리를 두른 식기의 가장자리에 짙은 핑크색의 작은 장미가 섬세하게 배열된 것으로 영국 로열 알버트 제품이다. 이 식기는 1938년 당시 이미 전 세계 상류층 여성의 ‘it 브랜드’였고, 해방 후 1980년대 초반까지 서울 남대문의 수입잡화점 ‘도깨비 시장’에서 고가 수입 혼수품 1위였다. 정교하고 화려한 로열 알버트의 문양과 행남자기의 홍장미 문양은 분명 정감이 다르다. 섬세하게 계산된 조형성과는 대조되게 짙은 장미 옆에 자연스럽게 휘어진 잔가지의 꽃을 두르고 수묵의 농담을 넣은 것이다. 이 때문에 똑 떨어진다기보다는 수굿한, 미학자 고유섭의 한국의 미에 대한 표현을 빌리면 ‘구수한 숭늉의 맛’이 전해진다. 같은 장미를 보더라도 재현 방식과 표현의지의 지향점이 다르기에 나타난 결과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점차 바로 이 맛에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애매하게 촌스러운 찻잔. 한참 유럽 앤틱에 빠져 있다가 요즘은 코리아 빈티지가 참 예뻐 보인다”는 감상이 달렸다.
■ 만드는 기술에서 향유하는 문화로 식기류 광고를 보면 1970~1980년대까지는 기술이 주로 부각돼 ‘기술 수출 1위’ ‘50년의 전통과 첨단의 기술이 탄생시킨’ 등의 카피와 ‘민족기업’이라는 자부심이 자주 등장한다. 행남자기는 실제 자기 기술의 최고라 하는 본차이나 기술을 1957년 자체 개발했다고 한다. 본차이나란 흙에 소의 뼛가루를 섞어 투명도와 재질감을 높이는 것이다. 이 기술은 영국의 웨지우드사가 1720년대에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만든 것으로 당시 유럽에서는 기술은 물론 산업화 시대의 장식과 디자인을 위해 <장식문법> 등의 책이 발간되고, 기업과 디자인계의 연합단체 등도 출범했다. 현재 한국의 산업도자기는 전통이 주는 미적 쾌감도, 빼어난 스타 디자이너의 감각도, 유럽의 긴 역사에도 못 미치는 게 현실이다. 해방 이후 50여년을 ‘기술보국’의 길로 달리면서 디자인 교육에서 인재를 길러내지 못했고, 기업은 디자인보다 기술·마케팅 위주의 경영을 한 결과 최근의 ‘문화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이제 한국의 식기 시장은 그야말로 해외상품들의 각축장이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남대문시장이 자랑하던 그릇 도매상가는 영락하고, 백화점에서는 1년 내내 우아한 수입 식기 할인 페스티벌이 열린다. 또 다이소, 이케아의 저가·실용성 공략, 웨지우드·로열 코펜하겐·포트 멜리온 등의 명품 전략이 활개를 친다. 한국에서 ‘산업화’는 성공적으로 실현됐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취향과 차별화로 귀결되는 ‘문화’가 관건이다. 인터넷 발달, 세계화 등으로 세계 문화의 획일화, 취향의 동일화까지 이뤄지는 이 시대에 더 요구되는 것은 그 지역만의 미감이다. 한국의 독특한 미감을 더 살려내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기술력이 접목될 때 비로소 한국 식기는 산업을 넘어 문화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021946285&code=960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