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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으로 읽는 한국인의 삶](2)독서가 유흥이던 시절엔 표지마저 휘황찬란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ㆍ책 표지 - ‘딱지 책’에서 전자책까지 출판 130년

10월11일은 ‘책의 날’이다. 11일까지 열리고 있는 가을철 책 축제인 ‘서울국제도서전’(코엑스), ‘파주 북소리’(파주 출판단지)에는 지금 수많은 책들이 선보이고 있다.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퍼포먼스나 체험전 등 갖가지 부대행사들도 마련됐다.

책은 이제 홀로 지성을 전달하는 찬란한 영광의 매개체라기보다 안타깝지만 어쩌면 퇴락하는 문화물이다.

한국의 근대 출판은 1884년 최초의 민간 출판사 광인사를 필두로 1920년대의 성숙기, 30년대 후반 군국주의시대에 고도의 성장률을 보였다. 하지만 40년대 일제의 조선어 말살정책 등의 탄압으로 45년 상반기에는 겨우 46개의 출판사만 남아 있었다. 마침내 해방이 되고, 해방 이후 49년까지 4년간 무려 874개 출판사가 등장했다. 붓이 있어도 제대로 쓰지 못한 통한이 풀린 이 자유의 공간에서는 ‘쓰는 대로 글이 되고, 박히는 대로 책이 되면서, 8·15 이후의 장관은 실로 유흥계와 쌍벽을 이룬 출판계였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책의 거친 재생지 표면에는 “수상한(?) 고춧가루가 점잖게 박혀있었다”는 기록까지 전한다.

■ 전집 출판물, ‘도시 중산층’의 지위재

출판계의 대표적 토종장수 기업은 1945년 정진숙, 조풍연, 윤석중, 민병도에 의해 탄생한 을유문화사다. 첫 책은 <한글 글씨 체첩>이다. 궁서체에 능하던 이각경 글자체의 글쓰기 교본으로 붓 잡는 법, 글씨 쓰는 법 등을 그림으로 가르치고 있다. 최현배의 <우리말본>은 당시 인기가 높아 ‘이 책을 한 짐 지고 북으로 가면 명태를 한 달구지나 가져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쇄기 같은 출판기기나 원고 등이 모두 타버리고, 출고를 기다리던 새 책들은 바리케이드처럼 쌓여 총알받이가 되기도 했다.

60년대 들어서는 주류 출판사를 중심으로 사상·문학·아동류에 이르기까지 전집류 발간이 쏟아졌다. 주택건설 붐과 함께 하드커버의 전집물이 쫙 꽂힌 유리문 책장은 도시 중산층의 새로운 지위재였다. 사실 호화스러운 전집은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과시용적인 ‘속물 교양’의 표본으로 판매원들이 전국을 돌며 팔았다. 1932년 ‘일본 평론사’가 전국을 돌면서 50% 할인 판매한 사상 전집은 12일 만에 무려 2만 질이나 팔렸다고 한다.

60년대 시작된 전집류의 발간은 이후 80년대 초까지 이어져 판매원들이 대학교정 등을 찾아다니며 교양을 강조했다. 디자인적 측면에서 보면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 100권의 표지는 당시 보기 힘든 서양의 명화들로 구성돼 흥미롭다. 이 표지들은 화집이 귀하던 시절, 서양 예술에 대한 갈증나는 로망을 일부나마 만족시켜 준 주된 통로이기도 했다.

■ ‘딱지본’에 흐르는 하이브리드적 근대 미학

이런 전집류와 대비되는 지점에 문고본이 있다. 전집류가 속물적 럭셔리 교양의 상징이었다면, 문고본은 가난한 학생들이 주머니 돈으로 사볼 수 있는 가격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1978년 당시 학생 회수권이 15원일 때 삼중당 문고 한 권은 180원이었다.

사실 한국 출판에서 문고본의 역사는 만만치 않다. 한국 문고본의 효시는 1913년 육당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발행한 6전짜리의 <육전소설>을 꼽는다. 책 한권에 20~30전, 국수 한 그릇에 10전 하던 시절 6전은 파격적인 가격이었다. 하지만 인기가 없었는지 8종 10권의 책만 내고 단종된다.

표지는 붉고 큰 꽃이 피어난 화려한 아르누보 양식의 넝쿨로 덮여 있다. 이는 1901년 영국에서 발행된 <롱펠로의 시집>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아르누보 양식이란 세기말 유럽에서 성행한 것으로, 휘어진 식물덩굴과 꽃 등이 중심적으로 이루어진 장식적 디자인을 일컫는다. 최남선은 당시 자신의 <육전소설>에 대해서는 “책은 얌전하며, 값은 싼지라”하고 자부했다. 반면 보다 널리 읽히던 경쟁자 ‘딱지본’ 소설에 대해서는 각종 폐해를 지적하기도 했다.

 

육당이 못마땅해 하던 딱지본 소설은 표지가 아이들의 딱지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당시 최다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던 고소설이나 신소설의 활판본을 말한다. 1970년대까지 시골장터에서 팔던 이 소설의 표지들은 그야말로 딱지처럼 울긋불긋하다. 한국 전통 책의 표지는 능화판이라는 목판에 밀랍을 먹인 후 찍어낸 비단이나 겹겹의 종이로 만든 것이다. 종이 표면에 음각이나 양각으로 모양을 내는 형압 같은 가공법을 통해 도톰한 감을 지니게 한 디자인이었다. 전통 책 표지는 능화판은 많았으나, 그 모두를 색으로 나타낼 수 없었다. 하지만 딱지본 소설들이 관심을 끌면서 능화판 속에서 은닉되어 있던 전통 표상들은 마침내 색채와 이야기의 한 장면을 타고 나와 서구 이미지들과 교접하기 시작했다. 딱지본 소설은 그야말로 한국 전통 표상과 서구 이미지들이 만나 뒤섞이는 첫 번째 영토가 된 셈이다.

신소설 <구의 산>(하편) 표지를 보자. 전체 실내 전경은 그야말로 서양의 원근법으로 그렸으나, 뒤편의 검은 경찰복의 일본인들은 크게, 그 앞의 조선인들은 오히려 오종종 작게 그려져 있다. 주눅 든 조선인의 심성이 그대로 보이는 서글픈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신소설 목단화>는 서양꽃이 아닌 이 땅의 모란과 그 모란을 둘러싼 길상문으로 화려하다. 안국선의 <금수회의록>은 원색 바탕에 온갖 동물들의 표정이 눈길을 잡고, <춘향전>과 그 신소설판인 <옥중화>에는 아르누보 양식의 액자가 들어가 있다.

이렇게 이들 딱지본에서는 서양적이기도 하고, 조선적이기도 한 미감이 펼쳐지고 있다. 이는 조선 선비들의 책 표지가 전하는 담담함과는 아주 대조되는 하이브리드적 대중 미감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많은 문고본들이 1930년대 발간되기 시작하는데, 대부분 책 표지 테두리 장식에 제목만 바꾸어 발간됐다.

 

해방 후의 문고본 하면 삼중당이다. 1975년 12월에 100권을 한꺼번에 출간하였고, 매달 10권씩 500종을 간행한 삼중당 문고는 딱지본 표지처럼 내용 속의 한 장면이나 서양적인 추상화를 담아냈다. 비록 손바닥만 한 크기이지만 이국적인, ‘이그조틱한’ 서양적 감성을 느낄 수 있다. 시인 장정일이 “개미가 사과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 먹은 삼중당 문고”라고 노래했듯, 일제강점기 울긋불긋한 표지 속의 영웅담과 권선징악 이야기가 대중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면, 70년대 문고본은 답답한 시대의 동경과 지적 쾌락의 원천이었다.

 

■ 현대적 한국미의 원형이 싹튼 해방공간

1910~30년대 딱지본에서 보이던 원색적인 미감은 해방 후 현대적 조형감각으로 정리된다. 액자 도형과 전통 표상을 리드미컬하게 배치한 길진섭 장정의 <문장독본>(1948), 김용준 장정의 옥빛 띠와 섬세한 노리개 문양의 <역대조선문학정화>(1947), 이외에도 학술지 <학풍>, 소설 <잔등>(1946) 등에서는 잘 정제된 ‘조선적 아르누보’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끌었던 ‘빈 분리파’가 오스트리아 신화 속의 동물이나 꽃, 귀족층의 장식을 변용하여 유럽 아르누보 중에서도 독특한 족보를 이룬 것처럼, 해방기의 자유로움 속에서 현대적 한국 표상이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기에는 또 <뇌우>(1946년)처럼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표지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 정제된 어법의 한 요소였던 기골 있는 한자 타이포그래피의 미감은 한글로 전이되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특히 컴퓨터가 도입된 이후에 글자는 더 이상 몸과 정신이 조응하면서 ‘쓰는 행위’가 아니라 그리드 위에서 ‘만들어’ 배포하면 ‘입력하는 글자’로 되어 가기 시작했다.

전통 표상들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통의 현대적 해석’이라는 이름 하에 관광 포스터, 전통 문양집 등에 연이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의 재현은 자와 컴퍼스에 의한 해석으로 전통 표상이 지닌 기운생동이 사라진 모습이어서 젊은 디자이너들의 전통 혐오증까지 유발했다. 이는 디자인 정책으로는 국가에 끌려가고, 미학적으로는 서구나 일본에 가서 ‘디자인 방법론’보다는 그들의 ‘디자인 감각’을 학습해 온 디자인계의 한계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북 디자인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작가 사진을 넣어 새로운 미감을 선보인 1980년의 <매잡이>는 산만한 제목 서체와 이미지로 혼잡하던 책 표지를 단숨에 정리하면서 디자인의 힘을 보여주었고, 전문 북 디자이너를 탄생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최근의 표지도 하나 보자. 개항기 이후 독자를 유혹하던 현란한 색채도 이미지도 모두 다 버린 채, 찌르는 듯한 갈필 느낌의 한글 제목에 붉은색의 저자 이름만 또렷한 <박맹호 자서전 책> 표지다. 오로지 활자와 텍스트의 힘만으로 인간 정신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키워 온 책의 본질이 드러난 듯하다. 하지만 이제 이런 종이책은 북 아트의 이름으로 펴지도, 읽지도 못할 책이 되거나 카페나 호텔의 인테리어를 위해 트럭 단위로 팔리고 있다. 책들이 가상공간의 비물질계로 빠른 속도로 떠나고 있는 것이다. 종이책 대신 어떤 형태로 인간 정신을 다시 이끌어갈지가 출판 대국 10위권의 한국 출판계가 지닌 화두가 아닐까 한다.

 

원문보기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0092037195&code=96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