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이경훈] 한글 풀어쓰기 / 이경훈(건축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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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모펀드 관련 기사에 등장한 회사 이름은 마치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진 일인 양 영어 일색이다. 코링크피이, WFM, 블루펀드…. 외국에서 유래한 제도나 용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고유명사에까지 외국어가 지나치게 침투해있다. 신문 경제면을 읽노라면 토씨만 우리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주식거래소에 상장된 회사를 세어보니 외국어가 포함된 것이 62%고 아예 회사 이름 전부를 알파벳으로 쓰는 곳이 32%에 이르니 이름만 보아서는 외국회사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코스닥의 경우에는 더 심해서 총 1371개 기업 중 209개 기업만이 한국어로 된 이름이다. 멀쩡한 한국 기업이나 단체들이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 국민은행은 KB국민은행이고 농협은 NH농협이라고 한다. MG새마을금고에 이르면 할 말을 잃는다. 알파벳 선호는 의도나 배경과 상관없이 시각적 이유도 크다. 인터넷이 중요한 세상이니 시각적 이유가 더 클 수도 있겠다. 한글은 모음이 자음의 아래 오기도 하고 받침도 있어서 알파벳에 비하여 훨씬 많은 세로 칸이 필요하다. 작은 화면에 펼쳐지는 인터넷 페이지에서 텍스트는 정보뿐 아니라 이미지로서 가치가 중요한데 글씨가 커지게 되니 다루기 어렵다. 영어로 구성하는 것이 훨씬 깔끔해 보이는 이유이다. 건물의 간판이나 명함, 청첩장 같은 인쇄물에 영어가 넘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글꼴(font)의 문제로도 연결이 된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거치며 다듬어 온 알파벳에 비하여 한글의 글씨체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알파벳은 대소문자와 숫자를 모두 합치더라도 100자 미만이다. 이에 반해 한글은 1200자가량을 디자인해야 하나의 글꼴을 완성할 수 있다. ‘ㄱ’만 하더라도 모음이 오른쪽에 오는 경우와 아래 오는 경우가 다르다. 받침이 있는 경우가 각각 다르고 받침으로 쓰이는 경우가 다르며 ‘ㄺ’처럼 겹받침으로 쓰이는 경우가 다르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디자인해야 하니 젊은 디자이너가 혼자서 도전하기에는 벅찬 대형 프로젝트가 된다. 자본과 열의를 가진 기업 단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높은 해상도가 필요하고 글씨체도 다양하지 않으니 디자이너들은 문법에도 맞지 않는 영문 텍스트로 채우게 된다. 이 지점에서 한글 풀어쓰기가 대안이 될 수 있다. 해상도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고 단 24글자로 이루어진 다양한 서체디자인이 가능하다. 받침은 초·중·종성으로 음절이 완결된다는 500년 전 생각이다. 초기에 음가가 없는 이응을 써서라도 종성을 챙겼던 것은 생략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훈민정음에 있었던 4개 문자도 사라졌다. 창제 당시 세로쓰기 관습에 적합했지만 이제는 책도 신문도 인터넷도 가로쓰기로 변한 시대이다. 새롭게 진화하는 것이 맞겠다. 한글 풀어쓰기는 해방 직후, 최현배 등의 학자들이 주장하여 한때 호응을 얻기도 하였으나 인쇄 매체와 팩스의 발명 등으로 동력을 잃었다. 알파벳을 닮은 필기체 등을 주장하는 등 다소 과한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연구가 되어있기도 하다. 유네스코에서 문맹 퇴치에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의 이름이 세종대왕상이라고 한다. 한글이 실용적이며 여느 문자와 달리 고안되었다는 점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우기 쉬운 장점을 살려 진화한다면 문자가 없는 이들에게 보급하는 일도 늘어나지 않을까. 언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며 문자는 언어의 물질적, 시각적 기반이다. 해상도의 문제로 외국문자를 즐겨 쓰다가는 역으로 언어가 오염되고 다시 정신이 오염될 수도 있다. 받침을 없애고 나란히 쓰는 것으로 우리말을 보존하고 풍부하게 할 수 있다면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이것이 언어와 문자가 ‘사맏디 아니한 어린 백성들을 어여삐 여긴’ 세종대왕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 아닐까. 이경훈 국민대 건축대학장 원문보기: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05119&code=11171426&cp=nv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 이 기사는 '뉴스콘텐츠 저작권 계약'으로 저작권을 확보하여 게재하였습니다. |